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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공약(公約)이 되도록

이종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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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4.15 21:21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종구 수필가
이종구 수필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집 앞 도로에 현수막(표준국어대사전 ‘선전문ㆍ구호문 따위를 적어 걸어 놓은 막’)이 걸렸었다. 알림막이다. 처음 보는 크고 기다란 헝겊에 쓰인 글자, 친구들과 뜻도 모르고 큰소리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전국 불조심 강조기간”이라고. 그리고 그 밑에 연월일인 기간과 00중·00고등학교라는 글자가 인상적 이어 몇 번이고 쳐다보면서 읽곤 했었다. 흰색 헝겊에 파란색 글자와 ‘불조심’이 빨간색으로 씌어 진 그 현수막은 가을 하늘에 더욱 산뜻하게 보여 막 글을 깨우친 우리들에게는 호기심 자극하는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됐었다.

집 앞에 나가기만 하면 골목길에서부터 큰 도로까지 눈에 띄는 게 현수막이다. 각종 상품의 세일 안내, 아파트 분양, 상점 개업에서 행정·질서·법률 안내, 각종 공연 안내 등 그 내용도 다양하다. 어떤 것은 삶에 도움도 되지만 대개는 별 도움 없는 것도 많다.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면 크기와 거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길을 가로질러 전봇대 등에 거는 고전적 방법에서부터 수층이나 되는 빌딩의 벽면을 모두 덮은 벽걸이형, 신문지 크기만 한 족자형 등이 도로의 안전시설까지 감싸고 있다.

절기에 따라 수 없이 내걸리는 현수막이 있다. 추석과 설이 되면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추석 인사·설 인사용 현수막이 도로를 장식한다. 그런 현수막을 보면서 과연 저 인사말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까 생각도 해본다.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제3조와 그 외 조항을 보면 현수막도 지방자치단체장의 허가를 받거나 신고한 후 걸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현수막을 잘 살펴보면 허가나 신고하지 않은 불법 현수막이 많다. 또한, 현수막은 반드시 지정된 게시대 걸어야 하는데 걸려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저 가로수나 도로 안전시설, 도로 중앙분리대, 전봇대, 다리의 난간, 뒷동산 산책로 등 걸 수 있는 장소면 가리지 않고 건다. 어느 아파트 분양 현수막은 같은 내용의 현수막을 두서 점씩 연이어 걸어 놓기도 하여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알림욕심이 지나쳐서일까?

서대전 네거리에는 대전 중구청에서 현수막 없는 청정거리로 지정하고 위반 시 강력한 행정조치(벌금 등)를 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그 결과 산뜻한 도로변 모습과 꽃 핀 화단을 볼 수 있게 됐다. 통행이 많은 곳에 걸어 광고의 효율성을 높이고 싶겠지만 잘못 걸면 시민들의 빈축을 산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간혹, 현수막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횡단보도 위에 걸어 놓은 현수막이 시간이 지나 그 지지 줄이 끊어지거나 느슨해져 행인의 머리나 몸에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보았다. 전봇대나 가로등 기둥에 걸은 족자형도 행인에게 안전을 위협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안내 기간이 지난 현수막이 오래도록 걸려있어 보기에도 좋지 않다. 현수막을 거는 사람 따로 있고, 떼는 사람 따로 있는 모양이다. 건 사람이 떼도록 하면 안 될까?

선거철이 되면 현수막 걸기 전쟁이 벌어진다. 서로 잘 보이는 곳에 걸려고 이른 새벽부터 장소 선점에 다툼이 생긴다. 그런데 법을 만들고 주민의 대표가 되겠다고 나오는 사람들이 “선거”라는 특수성을 등에 업고 지정된 곳이 아닌 아무 데나 현수막을 걸어댄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들이 제시하는 공약들이 잘 지켜질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치러졌다. 올해도 어김없이 횡단보도 위에 현수막이 걸려있다. 선거 때이니 그렇다고 치고 관리나 잘했으면 좋겠다. 신호등도 보이지 않게 걸고, 바람에 흔들려 늘어진 현수막들이 좋은 인상을 주었는지 의문이 든다. 작은 것부터 솔선할 때 현수막에 쓰인 공약이 공약(公約)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공약(空約)이 된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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