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단꽃은 뿌리를 약용으로 쓰기에 밭에 심었다가 꽃이 피면 영양분이 뿌리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꽃을 꺾어버렸다. 그 꽃이 아까워 한 아름 앉고 학교로 가서 교탁 위에 꽂아 두고는 했다. 그래서 5월 한 달은 교탁 위에 작약과 목단 꽃이 내내 꽂혀 있고는 했다. 또한, 내게는 처연하게 목단과 작약꽃밭을 지나갔던 기억도 있다.
며칠 전이 5·18민화운동 기념일이었다. JTBC에서 도청점거 때 마지막 방송을 했던 분과 인터뷰를 했다. 40년 전 그 곱던 얼굴이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80년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가야금 반 친구가 있어 끝나기를 기다리며 복도유리창 너머로 힐긋힐긋 쳐다보았던 가야금 선생님이다. 5·18 때 도청에서 그 방송을 끝으로 무수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날 고등학교 2학년인 나는 여느 때처럼 학교를 갔다. 그 전날과 다른 거라면 곳곳에서 군인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4교시가 끝난 후 들어오신 담임선생님은 몸조심하라고 하시며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오랫동안 휴교에 들어갔다.
휴교 다음 날 금남로에 잠깐 나갔다가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내가 다니던 학교 주변에 고등학교가 몇 개 있었던 까닭에 중학교 동창들 자취하는 집들이 근거리에 모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모았고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해 버스가 다닌다는 화순까지 30여km를 걸었다. 광주를 탈출해 길게 걷는 행렬 위로 낮게 떠서 주위를 배회하던 헬리콥터의 공포,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던 친구들의 소식, 민주화운동, 감옥, 민주화로 해금이 되어 뒤늦게 복학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그들이 겪었던 트라우마로 한 친구는 스님이 되었고, 또한 친구는 종교에 빠져 산으로 들어갔고 또한 친구는 살풀이춤으로 한을 달래다 어딘가로 떠났다. 그들이 왜 그 트라우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이 이해가 된다.
이제는 나와 소식이 끊어진 그 친구들도 가야금 선생님이 40년을 살아냈듯이 어디에선가 이 오월을 함께 하고 있을까? 그들의 희생으로 나는 오늘 편안한 일상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
가야금 선생님은 그동안 이름까지 바꾸고 살다가 이제 다시 대중 앞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평가를 받지도 못하고 있으며, 질곡의 세월 40여 년은 또 누가,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40년 전 화순까지 걷던 길가에 처연히 피었던 그 목단과 작약을 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40년 묻고 지냈던 마음에 부채가 오늘따라 더 무겁게 짓누른다. 차를 몰고 들판으로 나왔다. 오월의 하늘은 늘 그랬듯이 야속하게 푸르기만 하다.
5·18기념식에서 가수 김필이 불렀던 ‘편지’라는 노래 가사가 마음에 남는다. “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 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 가오”
5월의 푸르름을 맘껏 만끽할 날은 있을까? 하루빨리 진상규명이라도 된다면 살아남은 우리는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