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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정책자문단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윤석환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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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8.18 10:0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윤석환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윤석환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선택지가 하나라면 고민은 덜하지만, 없거나 여럿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그때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듣는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 합리적으로 결정하겠다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필자가 현재 정책자문단으로 위촉되어 있는데, 임기가 끝나 재위촉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동의하면 재위촉 지원서를 작성해서 보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통화를 하면서 어느 자치단체의 정책자문단이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이번에는 어떻게 운영될지 궁금했다.

그 정책자문단 위촉식은 나름 색달랐다. 자문단 규모부터 그랬다. 자문단원으로 위촉된 사람은 서른 명이 넘었다. 요즘은 규모가 많이 커졌지만, 그 당시 같은 수준의 자치단체보다는 훨씬 많았다. 정책자문단의 규모보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자문단장 선출이었다. 잘 짜진 틀 속에서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내정된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경선을 통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장이 내정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여튼 익숙하지 않은 경선이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진지하게 이 지역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된 분에게 투표했고, 이렇게 출발하는 만큼 정책자문단은 나름 어떤 역할을 하겠다는 기대도 가졌었다.

결과는 기대와 너무 달랐다. 정책자문단으로 위촉된 이후 정책자문단은 사라졌다. 정책자문단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분과별로 자문회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필자가 소속된 분과회의는 그랬다.

열리지 않는 자문회의와는 달리, 경선을 통해 선출된 자문단장에게서는 두 차례의 메일이 도착했다. 하나는 의미 있는 자문단이 운영되도록 자치단체에 건의하거나 논의할 만한 안건을 제안하라는 메일이었다. 그때 안건을 제안하지는 않았다. 생각하건데, 다른 자문단원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만약 검토가 필요한 안건을 제시하고 자문을 구했다면, 고민하고 학습하면서 의견을 냈을지도 모른다. 명색이 전문가라고 자문단에 위촉되었으니 모르는 척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문단장 스스로 자문단원들에게 자발적인 고민을 기대한 것이기에, 너무 이상적이었고 어쩌면 순진하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놀라운 것은 두 번째 메일이었다. 단장 직을 사퇴한다는 내용이었다. 자문단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사퇴한다는 자괴감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기대가 있었기에 충격이었다. 경선을 통해 당선된 단장이었기에 그랬고, 그동안의 운영과정이 떠올랐기에 수긍이 갔다. 의욕 가득 찬 자문단장에게 정책자문단 회의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자문회의 개최는 자문단장의 권한 밖이었다. 전체 회의는 자치단체장이, 분과회의는 실·과장에게 권한이 있었다. 자문단장 스스로는 회의의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몬 교수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인간은 완벽하게 합리적이지 못하며, 합리성의 추구는 태생적으로 제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다. 이성보다는 직관과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도 한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결정도 적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합리적이고 완벽한 결정을 원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합리성이 제약되어 최적의 결정 대신에 적당히 만족한 수준에서 인간들은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나 조직의 경우도 별반 차이가 없다. 집단이나 조직의 결정도 결국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들은 대부분 그들의 업무와 관련된 자문위원회를 두고 있다. 2019년 6월 기준으로 중앙행정기관이 설치하고 있는 자문위원회는 534개다.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제한된 합리성을 보완하는 장치가 그만큼 필요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합리적 결정을 해보겠다는 행정기관 나름의 제도적 노력으로 보인다.

자문위원회가 항상 합리적인 결정을 이끌고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자문하는 것이기에 결정에 대한 구속력도 없다.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을 통해서 정책결정이 이루어졌다는 절차적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운영되는 경우도 있다. 분명 형식적 운영은 문제이지만, 그렇더라도 자문위원회는 더 많이 운영되어야 한다. 행정기관의 정책방향에 문제가 있으면, 어느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당신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이질적인 다른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려야 한다. 잘못된 결정을 내버려 두고, 그것을 밀어붙이게 해서는 안 된다. 전지전능한 결정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의견을 묻고 듣는 것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행정기관은 더욱 그렇다.

정부는 종종 위원회를 정비한다. 필요에 따라 폐지하고 신설한다. 필요가 없어져서 폐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운영 실적이 없어서 폐지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정비는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설치하면 운영도 제대로 하여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자치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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