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그래도 9월이다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20.09.15 10:37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시간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 선선한 가을로 들어서는 중이다. 한낮에는 더운 기운이 살짝 남아있긴 하지만 여름에서 비껴있는 가을볕과 맑은 바람은 그야말로 더도 말도 덜도 아닌 딱 좋은 기온을 불러들인다. 달빛이 하얀 밤이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가을의 운치를 더하고 걸음을 걷듯 하루 한 뼘씩 달라지는 온도의 변화에 출근길에는 의례 겉옷을 챙기게 된다. 온기가 그립고 고마운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 송나라의 대문장가 구양수(歐陽脩)의 ‘추성부(秋聲賦)’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밤이 깊어 사위가 고요한 어느 늦은 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쌀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을 살피고 온 동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달이 밝고 은하수는 선명하오나, 사람이라곤 자취도 없나이다. 소리는 다만 숲속에 있을 뿐입니다.” 했다. 구양수는 “어허! 이것이 가을의 소리라고 하는 것이구나.” 탄식했다. 그리고 이로써 가을을 가리켜 형관(刑官)의 계절이라고 불렀단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가을은 그렇게 소리를 안고 온다.

가을의 색깔이 절정에 달한 주말 오후, 여름내 끼고 살았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무더웠던 여름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 선풍기를 해체해 깨끗이 닦아 창고로 들여보내고 에어컨 코드를 뺀 후 덮개를 씌워 다시 내년을 약속하며 긴 휴식의 시간을 주었다. 겨울이 오면 김장을 하기 위해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공수해 둔 말린 고추를 다듬고, 창가에는 아늑하게 커튼을 달았다.

지난주에는 집에서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렸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밖에서 모임을 하기엔 불안의 요소가 많아 선택한 최선의 상차림이었다. 전날부터 집안 대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미역을 물에 담갔다. 잔칫상의 필수라고 하는 갈비찜부터 잡채까지 서툰 솜씨나마 정성을 다해 신경을 썼다. 평소 어머님께서 즐겨 드시던 나물 반찬까지 고기를 재우고 채소를 다듬느라 밤늦게까지 앞치마를 벗지 못했다. 초저녁잠이 많아 저녁상을 물리면 책장 몇 페이지를 넘기기 무섭게 잠이 들곤 했는데 그날은 밤늦게까지 이리저리 부산하니 주방에는 얼씬도 안 하는 남편과 아들까지 나와서 일손을 보탰다. 오랜만의 합심이었다.

본래 어머님께서는 집안에서 잔치 음식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다. 당신께서 평생 그리 사셨기에 귀한 남의 자식 데려다가 똑같은 굴레에 넣기 싫다며 늘 생신이나 집안 행사 때엔 외식으로 분위기를 몰았다. 그때마다 나는 죄송하면서도 깊은 배려에 감사했다.

어머님께서는 당신의 여든다섯 번째의 생신을 그렇게 맞이했다. 직장 다니기도 바쁜데 음식 장만하느라 고생 많았다며 손을 잡아 주시는데 순간 코끝이 시큰했다. 음식 솜씨가 그리 빼어나지 못해 훌륭한 상차림은 아니었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는 한마디로 나를 춤추게도 하셨다. 코로나19의 여파는 때론 이렇게 가족을 하나로 묶는 융합의 힘도 가졌다. 온 가족이 함께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나누는 속에서 가족애는 꽃처럼 피어난다.

계절의 변화가 더없이 어려운 지난 시간이었다. 긴 장마와 모진 태풍을 견뎌야 했고 이제나저제나 끝날까 참고 기다리며 마스크를 벗지 못한 지난 여름이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고 찻집에 앉아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참새처럼 재잘대며 한창 뛰어놀아야 할 유치원 아이들과는 단 한 번도 밖으로 체험학습을 떠나지 못했다. 가족끼리 여행 한 번 가지 못하고 직장과 집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조심조심 오고 가기만 했다.

그래도 9월이다. 오래전 어느 가수가 불렀던 노래처럼 그래도 9월이다. 감염병과 온갖 자연재해에도 끝내 맞이한 9월. 맑은 바람이 불어 온도와 습도를 몰아내 더없이 가볍고 산뜻한 날로 가득한 가을이다. 들녘의 열매들은 하루하루 익어 어느 농부의 땀방울에 답장을 시작하는 시간이며 가을의 전령사 코스모스도 길가에서 유유자적 가을을 알리고 있다. 저마다의 일상이 높고 맑고 파란 하늘처럼 빛나는 9월이기를….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