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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어떻게 사라져야 하는가?

윤석환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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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10.06 18:0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윤석환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윤석환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추석이었다. 휴일이 길어서 그 어느 때 보다 여유롭다. 떨어져 생활하던 형제들도 만날 수 있으니 행복하다. 물론 이번 추석은 예년과는 달랐다. 사업을 하건 직장을 다니건 간에 그들은 힘들어했고, 조카들도 오지 못했다. 가족들 모두가 함께 가던 성묘도 일부만 다녀왔을 뿐이다.

이번 추석에는 큰 고민이 있었다. 올여름 계속되었던 장마로 인해서 선산의 끝자락에 있던 형님의 산소가 일부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 벌초 때 ‘산소를 어떻게 할 거냐’를 놓고 이야기는 시작되었고, 벌초에 오지 못했던 형제들이 성묘를 다녀와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보수하면 된다는 이야기부터 이참에 이장하거나 화장해 모시자는 의견까지. 결론은 이랬다. 조카들도 이젠 불혹을 넘었으니 그들의 결정에 따르자고.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결정방식이라 낯설지 않았다.

물론 추석에는 늘 형제들과 같이하던 고민이 있었다. 앞으로의 벌초와 성묘를 우리의 자식들이나 후손에게 맡겨야 하는지. 형제가 사촌으로, 사촌이 팔촌으로 가족이라는 테두리의 구성원은 늘어날 텐데, 지금처럼 다 같이 모일 수는 있을 것인지. 1년에 한 번조차도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이런 전통적 행사를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건대 우리 형제만이 아닌 우리 시대 모두의 고민인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어떻게 사라져야 하는가를 고민해 봤다. 이 세상에서. 내가 돌아간 이후에 나의 흔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흔적도 남김이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강물에 뿌리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산에 뿌리자니, 적당한 땅도 없다. 화장 이후에, 납골당, 수목장도 흔적과 불편을 남기니 내키지 않는다. 명절에 모이는 것도 번거로울 것이고, 성묘나 벌초는 더더욱 어려울 미래에는 그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 결국, 언젠가는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니 더더욱 그렇다. 사는 것도 힘든데, 사라지는 것도 정말 어렵기만 하다.

정신의학자 이시형 박사는 실체가 없다고 여겨지던 화병(Hwa-byung)을 정신의학 용어로 만든 분이다. 그도 ‘나 떠나는 날엔’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흔적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유골 한 줌 얻어 와 고향 마을 선산 그리고 내 혼을 피워낸 선마을과 세로토닌문화원 한쪽에 뿌려졌으면 영광이겠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마지막 장을 써놓고 나니 우리 아이들이 그러면 너무 서운해서 안 된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면 작은 목관에 내 이름을 써서 선산 내 자리에 꽂아라. 짐승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작은 걸로 해라. 그리고 너희가 세상을 뜰 즈음에 비목도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해라’.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조차도 이런 생각을 가질진대, 나 같은 범부는 더더욱 흔적 없이 사라짐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흔적 없이 사라지려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인생의 시간을 가능한 많은 것들로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불교 교리의 하나인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은 삶의 좋은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만, 단 한 번뿐인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축복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범부들은 좀 더 아쉬움 없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 한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족들의 다른 희망이 있다면 조금은 흔적을 남겼다 사라질지도 모른다. 흔적 없이 사라지겠다고 남겨진 가족들을 정떨어지게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죽고 난 다음 일인지라 큰소리치지도 못한다. 예의 없는 자식이라고 혼내지도 않을 텐데, 흔적 없이 떠나보내는 두려움과 아쉬움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나와 우리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는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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