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虛勢 : 실속 없이 겉으로만 들어나 보이는 기세)를 나타내는 근본은 자신이 잘났다는, 남에게 질 수 없다는 일종의 자존심의 발로인 것 같다. 특히 현역 복무를 하지 않은 친구들이 ‘전방에서 근무했었다, 철책선에서 근무할 때’ 등등의 이야기로 오히려 실제로 근무한 사람보다 더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물론 즐거운 대화와 모임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웃어넘길 만하나, 그 허세가 계속되면 믿음이 떨어져 신용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신라의 원광법사는 화랑들이 지켜야 할 세속오계에 교우이신(交友以信 : 벗을 사귀는데 믿음이 있어야 한다)을 들었다. 허세를 부리는 친구들의 말을 몇 번 들으면 그 repertory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음을 느낀다. 급기야는 자신의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짜 증인을 세우기도 한다.
허세와 비슷하게 “~척하는” 친구들도 있다.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했어도 안 한 척, 안 했어도 한 척 등 사람을 속이거나 기만하는 “~척하는” 친구들도 그 행위가 잦으면 또한 신용을 잃는 것을 종종 본다. “~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불리함을 가장하기 위해서, 타인보다 열등의식을 가장하기 위해서, 자신을 돋보이려는 욕심 등이 있기에 그러는 것 같다.
covid19 감염자가 세계적으로 높은 Brazil의 Jair Bolsonaro 대통령은 수상 스키를 즐기고, 마스크도 쓰지 않고 수백 명을 만나기도 했으며, 미국의 Donald Trump 대통령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유세를 하고 covid19의 위세를 폄하 하다가 결국 covid19에 감염됐다고 외신 보도는 전했다. 치료를 잘하여 나았지만, 국민의 안전에 솔선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정치 지도자로서 좀 과한 허세가 아닌가 싶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치인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장, 관공서·직장의 장을 마치 자기가 잘 아는 친구처럼 낮추어 부르는 모습을 본다. 직명을 붙이지도 않고 “그저, 000, 내가 많이 키워줬지”, “걔, 나랑 친구야”, “000, 걔 요새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 등 인물을 헐뜯으며 자신이 잘 난양 뻐기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다. 삼국지(三國志)의 대표적 등장 인물 조조((曹操)와 유비(劉備)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조조는 능력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능력 없는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는 능력의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래서 유비 곁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7:12)”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낮추어 부르는 그 사람도 결국, 다른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부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게다.
허세를 잘못 부려 평생 아내에게 매여 사는 사람을 알고 있다. 부인의 이야기로는 결혼할 무렵 중매를 통해 남자를 소개받았는데, 직업이 의사라고 했단다. 지금도 그렇지만 40여 년 전 의사라는 직업은 대단한 결혼 상대 감이다. 선을 보고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병원은 다니는데 병원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였단다. 그러니 평생을 큰 소리 한 번 못하고 아내에게 매여 산단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했으면 긴 세월 행복을 가꾸며 살아왔을 텐데…
허세를 부리지 않음은 겸손함과 통한다. 상대보다 좀 낮추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곧 덕(德)이다. 그래서 지금도 유비는 추앙을 받는다. 우리 같은 서민의 허세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기도 하지만, 지도자들의 허세는 사회와 나라에 큰 피해를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