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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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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11.24 15:01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차가운 별빛 아래 풀벌레의 애조마저 뚝 끊어지고 서리가 하얗게 내리며 가을이 깊어지자 국화가 시절을 만난 듯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하나는 황국, 하나는 자국이었다. 한 쌍이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가을날 초례청에 서 있는 신랑 각시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워서 집안이 경사스러웠다. 국화꽃은 소설(小雪) 무렵까지 내내 피어서 아버지의 창을 우수로부터 막아 주었다.’ 목성균 선생의 수필 「국화」에 나오는 문장이다.

목성균 선생의 「국화」는 중풍을 앓아 거동이 불편한 당신 영감님의 적막한 만추를 생각하여 팔십 노모가 거실 창문 앞마당 잔디밭에 두 그루의 국화를 심어놓은 이야기다. 늦가을 추위가 오면 밖에도 못 나올 남편에게 좋은 동무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가을이 깊어가고 국화가 만발하면 잊지 않고 찾아 읽게 되는 수필이다.

절기상 첫눈이 온다는 소설(小雪)이 엊그제 지나갔다. 옛말에 “소설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고 아파트 단지 화단의 국화 꽃잎이 갈색으로 변했다. 지난 주말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급기야 기온이 뚝 떨어진 밤을 보낸 후 꽃은 찜솥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관리사무소 경비실 직원들이 수레를 끌고 다니며 무너진 꽃 더미를 잘라내고 뒷정리를 하는데 마음속으로 휑하니 바람이 스쳤다.

소담스레 꽃송이를 피워 가을의 전령사 노릇을 톡톡히 해낸 국화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부터 피기 시작해 노랗게 군집을 이루며 지나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 지 두 달도 넘었다. 바람이 불고 가을비가 추적여도 한결같이 본연의 색을 간직하며 꿋꿋했다. 그런데 지난밤 된서리에 꽃은 제 색을 잃고 말았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하루의 절반을 생활하는 유치원 앞마당에도 소국과 적국이 나란히 피어있었다. 아는 지인이 취미 삼아 재배하기 시작해 정성을 듬뿍 들여서인지 잘 자랐다며 화분 몇 개를 보내주었고, 좀 더 오래 두고 보고자 아예 마당 곳곳에 땅을 파고 심었다. 노란색과 적색을 보기 좋게 배치하니 친구인 양 어우렁더우렁 마당을 서너 달 가까이 가을 풍경으로 만들어 준 고마운 국화가 조만간 그루터기조차 사라지게 생겼다.

나는 올망졸망 눈망울을 반짝이며 웃는 아이들에게 앞마당의 국화꽃으로 가을을 가르쳤다. 코로나 19로 야외 체험학습이 모두 중단된 가운데 한창 뛰어놀고 눈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해야 할 아이들에게, 온종일 교실 안 수업은 참으로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었으리라. 사랑이 많은 아이들은 깊어가는 가을 내내 한결같이 유치원을 들고나는 찰나의 시간에도 꽃을 보고 향을 맡으며 귀여운 눈인사를 잊지 않았다.

코로나 19로부터 시작된 낯설고 생경한 시간 속에서 국화 다발은 나에게도 적잖은 위안이었다. 몹쓸 바이러스로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고 사회적 거리 두기는 좀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정된 공간에서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긴 시간은 생각보다 불편하고 혹독했다. 간간이 계절마다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지만 가장 오래도록, 그리고 깊숙이 내 옆을 지킨 것은 결국 국화였다.

누구에게나 고단하고 버거운 시간이 있다. 그때 나에게 위안을 주고 스스로 위로가 된다고 느낄만한 대상이 있다면 그 시간은 더는 힘든 시간이 아닐 것이다. 산으로 들로 가을 단풍 구경을 다니지 못했다 한들 우울할 필요는 없다. 길을 걷다가 혹은 하루를 소일하는 근처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우연 하나에 의미를 달면 된다. 꽃이 졌다 한들 가을 내내 유치원 앞마당에 흐벅지게 피어 향기를 날리던 시간이 사라지겠는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정해놓은 한정된 공간에서 지난 계절을 함께 한 국화 옆에서 받았던 조용한 위로를 나는 오래 간직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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