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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힐빙과 누에(蠶)의 귀환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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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12.13 14:3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뒤숭숭한 가운데 올해를 마감하는 12월이다.

그동안 지나친 욕망과 자아실현 욕구의 괴리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이 자연생태질서 순환환경에 순응하는 전통농업현장에서 자신들의 향상성을 지켜줄 수 있는 지속가능한 농업·농촌모델로서의 힐빙밸리 조성이 크게 요구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마침 ‘부안 농생명 힐빙밸리 조성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 평가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평가를 마치고 150년 전통의 누에마을인 유유마을을 찾았다. 상징적인 부안누에타운 박물관 규모는 2층 2동에 연면적 2260㎡이다. 유용 곤충인 누에의 생활과 산업적 이용을 보여주는 민속 양잠 기구, 3만여 마리의 희귀곤충 및 국내 최고의 전자현미경을 보유하고 있는 누에 곤충과학관, 누에와 함께하는 정글 탐사형 탐험관, 오디, 뽕 누에의 과거와 미래를 배우는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에와 뽕잎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앙증맞은 캐릭터를 이용한 접근이 관람객에게 편안함을 선사해준다. 양잠의 종류와 그에 따른 누에고치, 비단실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그마한 알에서 깨어나 뽕잎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던 누에는 펄펄 끓는 물 속에서 한 올 한 올 명주실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맛있는 번데기가 되어 주린 배를 채워 주었던 누에의 추억이 떠오른다. 요즘은 누에를 거의 볼 수 없고 번데기도 거의 중국산이다. 누에는 멧누에나방(蛾)을 사육 개량하여 누대 사육한 결과 많은 품종이 생겼다. 어른벌레는 입이 퇴화하여 먹이를 먹을 수 없으며 나는 힘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누에는 인간과 함께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유년 시절 학교에 다녀온 후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마을 어귀 아버지가 일하시는 뽕밭으로 향한다. 텅 빈 집은 누에가 지키고 온 식구가 뽕잎 따기에 여념이 없다. 봄엔 가지째 잘라다 집에서 앉아 딸 수 있지만, 가을엔 뽕나무를 다치지 않게 검지손가락에 뽕 따는 칼을 끼우고 한 장씩 따야 하기에 더디다.

봄누에를 칠 때는 달콤한 오디를 따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검게 익은 오디를 한 주먹씩 따 먹느라 뽕잎 따는 일은 뒷전이다. 손과 입이 새카맣도록 따 먹던 달달한 오디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에 돈 가뭄이 극히 심한 봄에 누에를 출하하게 되면 농가의 더 없는 소득원으로 자식들의 수업료를 밀리지 않고 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추석 명절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던 누에가 아닌가.

누에는 일 년에 봄, 가을 두 번 사육 한다. 좁쌀만 한 누에 알을 하얀 종이를 깐 다라에 담아 따뜻하게 해 주면 알에서 깨어난다. 너무 작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어 닭털이나 꿩 털로 조심히 다룬다. 눈썹만 한 누에에 연한 뽕잎을 따다 칼로 곱게 썰어 주시던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은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멀리 떠나셨으니 말이다.

이삼일 정도 뽕잎을 먹은 누에는 잠을 잔다. 누에는 잠을 잘 때 머리를 쳐들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잠을 자고 나면 허물을 벗는데 고치를 짓기 전까지 네 번의 잠을 자고 허물을 벗는다. 그때마다 몸은 두세 배씩 커진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이 커져 자리를 넓혀 주어야 하기 때문에 누에채반 수가 늘어난다. 막 잠을 자고 일어난 누에는 일주일 정도 대식가가 되어 뽕잎을 수북이 덮어 주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금방 다 갉아 먹어 치운다. 앙상한 뽕나무 줄기만을 남긴 채 머리를 흔들며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하루에 예닐곱 번씩 일주일을 이렇게 먹고 나면 밥을 먹지 않고 입에서 하얀 실을 내 품기 시작한다. 이때 누에를 골라 섶에 올려 준다. 섶에 올라간 누에는 마지막 한 방울의 오줌과 똥을 싼 후 하얀 고치를 짓기 시작한다. 입에서 나오는 한줄기 실로, 장방형의 집을 짓는 모습은 가히 예술이다. 집을 다 지은 누에는 고치 속에서 마지막 허물을 벗고 번데기(踊)로 변신한다. 장날이나 극장 앞 작은 리어카에 연탄 화덕 위 양은 솥을 싣고 다니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번데기를 종이 고깔에 담아 팔던 번데기 장수의 “뻔데기~”를 연호하던 구슬픈 외침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마을마다 비탈진 밭에 그리 많았던 뽕나무(桑)밭과 누에 치는 농가를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농촌의 고령화와 인력 부족도 외면당하는 이유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환경이다. 누에는 깨끗한 뽕잎만을 먹여야 하는데 공해와 농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가의 중국산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누에 가루는 당뇨에 좋고 기를 돋우며 뽕나무 잎, 줄기 뿌리 오디 누에똥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잠사 시험장 관리인은 침이 마르도록 누에의 효능에 대해 설파한다. 누에 실 셈으로 보습과 영양이 뛰어난 화장품 개발에 성공했고, 황금 누에고치를 탄생시켰다. 지금은 형광 누에고치 연구가 성공 단계에 이르렀다며 누에 치는 기간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출근한다고 누에를 예찬한다. 그는 “우리 민족의 생활에 근간이었던 누에가 지금은 외면받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목받을 때를 위해 맥이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라고도 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나서 스스로 실을 토해서 몸을 감싸고 집을 짓는다. 그 집 누에고치는 명주실을 제공한다. 명주실의 길이가 무려 1200~1500m에 이른다. 그런데 누에가 자기를 감싼 집에서 나방으로 뚫고 나오면 스스로 토해서 집을 만든 실은 끊어져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희생하면 누에는 아름다운 옷을 만들 수 있는 명주실(絲)을 제공함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더욱이 누에고치에서 얻을 수 있는 실크 단백질로 인공 고막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니 누에는 생각할수록 기특한 사람들의 친구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실크푸드연구소를 열고 곤충 중에서도 누에를 이용한 음식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누에를 이용한 햄버거를 출시하여 젊은이들의 입맛을 겨냥하고 있다. 누에는 다른 식재료들과 궁합이 잘 맞아 미래에는 곤충식이 일상화되는 날도 머지않았다.

셀리의 시어처럼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누에를 생각하며 새 희망을 품어 본다. 고향 초평에 묵밭을 일구어 봄이 오면 뽕나무 묘목을 심고 오디가 열리면 이웃과 나누고 싶다. 가능하면 누에치기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연일 치솟는 코로나19 확진자로 가장 어려운 한 해 끝자락을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를 이기는 길은 여러 가지 해법이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을 줄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늘이 이미 마련해 놓은 동식물을 받아들이고 자연과 공존하는 것이다. 궁중에서도 누에를 친 조상의 슬기가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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