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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범 내려온다’의 진짜 의미

최혜진 목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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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1.18 14:1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최혜진 목원대 교수
최혜진 목원대 교수
지난해는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힙한 장르로 떠올라, 젊은 층은 물론 세계인들의 관심을 엄청나게 많이 받은 한 해였다. 동시에 판소리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우리 음악의 경쟁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실험하고 확인할 수 있던 한 해이기도 하였다. 내용은 잘 몰라도 ‘범 내려온다’를 무한반복으로 흥얼거리며 새로운 음악문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 <수궁가> 중 한 대목인 ‘범 내려온다’는 산 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기세등등하게 내려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호랑이 한 마리가 누에머리를 흔들며, 화살통같은 다리에 새낫처럼 날이 선 발톱으로 잔디뿌리를 할퀴며 내려온다. 왕모래를 마치 눈처럼 흩뿌리며 내려오더니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소리가 온 산천에 울리고 땅이 툭 꺼질 듯이 뒤덮힌다. 흥겨운 노래 속의 장면은 호랑이의 등장으로 산 속 동물들이 공포에 휩싸이게 되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수궁가> 내용을 통해 호랑이가 무섭게 등장하기 이전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토끼를 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세상에 올라온 자라의 눈에 비친 것은 산속 동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 회의란 것이 서로 나이자랑을 하면서 어른이 되겠다고 다투는 내용이다. 상좌, 즉 지금으로 이야기하자면 ‘장(長)’자리 좋아하는 인간들의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서로 어른이 되어 높은 자리에 올라 에헴하고 대접을 받으려 싸워대는데, 그 내용인즉 먼 옛날 아무개와 동갑이라든가, 더 먼 옛날 아무개와 친구라는 허위, 과장이 섞인 이야기들이다. 리더가 되기 위한 실력이나 인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다. 그 가운데 토끼를 본 자라가 ‘토선생’을 부른다는 것이 수궁천리를 아래턱으로 밀고 나오다보니 힘이 모자라 ‘호선생’이라고 부른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나이다툼으로 어수선한 자리에는 없었던 호랑이가 자신에게 ‘선생’자 불러주는 소리를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용감하게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호랑이 빼고 잔치를 열었던 동물들이 순식간에 호랑이밥이 될 공포에 떨었을 것임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호랑이는 자신을 누가 불렀느냐고 눈을 번뜩이며 내려와 때마침 납작 엎드린 자라를 보고 먹잇감을 삼으려 한다. 자라는 난생 처음 본 호랑이가 무섭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용감하게 호랑이와 대치하고, 큰소리를 치며 호랑이 가운뎃다리를 꽉 무는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호랑이는 비명을 지르며 의주 압록강까지 순식간에 도망을 갔다고 하니,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이다.

처음으로 세상구경을 한 자라에게 비친 동물들의 모습은 허세나 과장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거나, 폭력과 권위로 공포 정치를 하는 호랑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믿고 세상을 지배하는 듯 했던 호랑이는 알고 보면 매우 어리석고 무능하다. 자라의 지혜 앞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쫓겨났으니 말이다. 자라 덕분에 그 산중 동물들은 한동안 먹잇감이 되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범이 내려와 당한 일을 생각해 보면, 위엄있게 내려오는 ‘범 내려온다’의 장면이 더욱 역설적으로 우습게 느껴진다. 얼마 있다 당할 망신은 생각지도 못한 채 온갖 폼을 잡고 내려오는 호랑이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 서민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전통예술이다. 그 안에는 변화되어야 할 것들과 비판받아야 할 낡은 것들이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21세기의 판소리는 또한 우리 시대의 것들을 수용하고 비판하고 갱신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 정점을 이날치 밴드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 음악의 세계화를 어떠한 식으로 이루어야 할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자기 지역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잘 간직한 문화일수록 세계 속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 앞으로도 다양한 도전과 실험이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원형과 전통을 잘 보전하고 이를 위해 공부하는 젊은 국악인들을 잘 육성하는 일이다. 충청지역의 소리 중고제를 되살리고 보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중고제를 살리고 전파하기 위해 젊은 소리꾼과 연주자를 기르기 위한 제도나 인프라가 갖추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중고제의 세계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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