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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나는 소망합니다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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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1.19 14:0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눈이 내렸다. 사람도 세상도 모두 잠든 지난밤을 틈타 꽤 많이 내렸다. 아파트를 에둘러 싸고 있는 소나무에도, 도로변 이팝나무 가지에도 눈송이는 탐스럽게 꽃처럼 피어 그 풍경이 가히 장관이었다. 이제 휴면기에 접어든 텅 빈 들녘은 물론 아파트 길 건너 교회 뾰족지붕 탑에도 눈은 온통 순백의 빛깔로 고요히 내려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새해 들어 두 번째 큰 눈이었다.

유년시절 해마다 겨울이면 내 고향에도 눈이 자주 내렸다. 밤새 소리도 없이 소복소복 내려앉아 아침에 일어나면 넓은 뜰 안이 온통 흰빛으로 눈이 부셨다. 마당 한 귀퉁이 솜이불을 덮은 듯 땅속 깊이 김장독을 묻고 짚으로 올린 지붕 위에도 함박눈이 내려앉았고 장독대에 모여앉은 장독들은 어느새 눈사람이 되어 불룩한 배를 내밀고 옹기종기 저희끼리 정다웠다.

눈이 무릎까지 차오르도록 많이 내린 날이면 아버지는 할머니께서 기거하고 계신 사랑방에 군불을 지피고 나서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었다. 엄마도 부엌아궁이에 불기운을 넣고 나면 함께 눈을 치웠다. 수숫대를 엮어 만든 작은 빗자루로 봉당까지 올라와 할머니 털신부터 내 동생 운동화에까지 내려앉은 눈을 탁탁 털어냈다. 이른 새벽부터 사락사락 아버지와 엄마의 비질 소리에 우리 자식들은 깨우지 않아도 앞다퉈 일어나 마당으로 나와 눈을 구경했다.

아버지는 눈을 쓸고 그 옆에서 나와 동생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눈을 굴려 내 키만 한 높이로 눈덩이를 맞붙여주면 나는 나뭇가지를 이용해 눈과 코를 만들고 동생은 병뚜껑으로 입을 붙여 눈사람을 완성했다. 엄마가 아끼는 양동이로 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주던 기억은 지금도 우리 남매가 공유하는 즐거운 추억 중의 하나다. 모양도 각기 다른 눈사람이 집집이 한 둘씩 만들어져 대문 앞이나 골목길에 세워놓은 모습은 그 집 앞을 지나치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소소한 볼거리이기도 했다.

며칠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수년 만에 내린 폭설에 다양한 캐릭터의 눈사람을 만들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한 사진들이 올라왔다. 어느 지역 한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는 소위 요즘 아이들의 대세라는 ‘겨울왕국’의 엘사 공주가 눈으로 재탄생 되었고 또 다른 지역 버스정류장 앞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 앙증맞은 눈사람을 만들어 놓은 영상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누구나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번질 듯 사랑스러운 눈사람을 이유도 없이 무너뜨리고 훼손하는 일부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위해 눈을 뭉치고 다듬고 만들었을 누군가의 마음을 알고 헤아린다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눈사람을 만든 사람도, 귀여운 눈사람을 보면서 잠깐이라도 즐거웠을 사람들 사이의 따스한 공감의 정을 무시한 이기적인 행동에 마음이 씁쓸했다.

교육자이자 저술가이며 평론가인 석학 이어령 교수는 새해 시제(詩題)로 ‘눈물 한 방울’을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화두로 삼았다. 그는 온 인류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지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우리에겐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절실하다고 피력했다.

코로나로 여전히 힘들고 암울한 시기이지만 새해가 아닌가. 새로운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내가 주어가 아닌 상대를 주어의 우위에 놓고 그의 언어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과 위로가 되어주는 모두에게 따뜻한 한 해가 되기를 눈 내리는 아침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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