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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고전(古典;Classic)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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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6.01 15:47
  • 기자명 By. 충청신문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영화에 평점을 남기는 앱을 이용한 지 꽤 오래됐다. 요즘 프로그램들의 알고리즘은 매우 정교해서, 내가 남긴 평점이나 ‘좋아요’ 갯수를 바탕으로 영화나 동영상을 골라서 추천해주는데, 이게 꽤 잘 맞는 편이다.

공연기간 중이었다. 휴식 중 숙소에서 영화를 보는데, 내가 어릴 적 만점 평점을 주었던 영화였다. 팬심도 발동하고 예전 추억도 되새길 겸 시간을 할애해서 봤다.

20년 전 안목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편집과 앵글이 촌스럽기도 했지만, 엉성한 스토리 구조에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개연성과 서사로 엉망인 영화였다.

모든 경험이 새롭던 어린 시절에 봤던 탓에 그랬겠거니 위로해 본다. 진부한 클리셰 투성이 영화였지만 당시엔 혁신적이고 변화를 선도하는듯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던 걸까.

충격을 가다듬고, 봤던 다른 영화의 평점을 훑어보니 내가 점수를 너무 박하게 주다 못해 도무지 내용이 기억이 안나는 영화들도 있었다. 분명히 보다가 졸다 깨서 짜증 섞인 평점을 날렸던 영화였지 싶다. 평점 높은 예술영화였는데 평론가 그들만의 잔치였겠거니 치부하며 핀잔을 주던 기억이 났다. 한편으론 예술영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내 자신의 안목이 의심스러운데다, 도무지 봤어도 기억이 안나는 영화가 도대체 어땠길래라는 생각에 다시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전에 만점을 주었던 영화와, 보다 졸던 예술영화의 평점을 서로 맞바꿨다.

속도감 넘치는 빠른 편집과 화려한 화면 효과는 빈약한 서사와 극적 장치를 감추기 위함이었고, 느릿한 전개와 답답하리만큼 고정된 시점은 인물과 극을 좀 더 낱낱이 드러내며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장치였다. 배우들의 연기도 결이 확연하게 달랐다.

바로크 시대 당시에는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오페라가 수백편이 넘었다. 처음에는 귀족들만 즐기다가 일반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후에는 현대의 스타-제작 시스템을 갖추며 흥행 공식을 써내려갔고, 서서히 관객의 취미와 입맞에 맞는 작품들로만 제작 방향이 바뀌었다. 편중된 스타시스템으로 제작하며 한정된 제작비에서 유명한 가수 캐스팅과 화려한 무대제작에 투입하는 예산이 늘게 되니, 음악의 질과 극의 구성엔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심지어는 캐스팅된 스타 주역이 신예 작곡가의 곡을 거부하며 다른 오페라 곡을 멋대로 가져다가 부르거나 무대 구성과 효과에도 참견하기 일쑤였다. 제작사들은 스타의 입맛에 맞춰 작곡하는 작곡자들에게만 차기 작품을 의뢰했고, 그 와중에 음악과 극 구성을 중시하던 작곡가들은 한낱 작가주의에 빠진 패배자쯤으로 치부당하며 외면당했다.

음악은 점점 화려해지며 난이도 높은 기교와 장식음이 넘쳐나게 되고, 무대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을 태운 구름이 떠다니며 화려한 효과와 춤이 난무했다.

그렇게 바로크 오페라는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상업예술이 대부분 그렇지만, 한 시대에 통용되고 팔리는 코드로만 제작하는 작품들은 정말로 쉽게 벌어들이는 만큼 쉽게 잊혀진다. 중심을 관통하는 내용과 작품의 메시지 없이, 관객이 선호하는 효과와 기교에 치우쳤던 작품들은 고전과 낭만시대를 거쳐 지금은 철저하게 잊혀졌다.

반대로 관객의 선호도에는 비켜갔지만 기존의 작품과 결을 달리하거나 음악과 극의 서사가 탁월한 작품들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돈 못버는 보헤미안 예술가 4명에 버려진 여인, 시대를 살아나가기 급급한 여자가 주인공인 파리 다락방 구석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오페라 ‘라 보엠’은, 초연 때 화려한 궁중이나 귀족사회의 단면을 기대했던 관객들과 비평가들에게 외면 당했지만 지금은 걸작의 반열에 올라있다.

또 비련의 여주인공의 순애보 넘치는 스토리를 기대하던 프랑스 관객이었건만, 1막 담배공장 여공들의 단체 흡연씬과 길거리 패싸움으로 열어젖힌 경악스런 오프닝도 모자라, 지조 따위는 아랑곳 않는 집시 여인이 탈영병 칼에 찔려 무대에서 죽어가는 엔딩의 오페라 카르멘도, 그 파격으로 초연 때 외면당했다. 그리고 그 파격은 시대를 넘어선 고전으로 살아남아 현대에도 끊임없이 다른 장르로 변주되며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흔히들, 고전(古典;Classic),을 이렇게 정의하며 조롱한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거나 보지 않는것”

책, 영화, 혹은 음악이건, 고전-클래식의 가치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곱씹고 되돌아볼 때마다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그게 고전의 정의다. 그리고 지금도 수 많은 작곡가들은 현재를 관통하는 파격으로 작품에 시대를 담아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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