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비판이 없는 사회는 발전적이지 못하다. 어느 조직이든 어떤 사회든 건강한 비판이 거침없이 오가야 한다. 그래야 바로 간다. 그래야 옳게 간다. 비판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발전을 거부하는 사회다. 비판이 들끓지 않는 사회는 건강성을 잃은 사회이다. 환부를 모르니 언제 어느 때 곪아 터질지 알 수 없다. 상처가 작을 때 소독하고 약을 바르면 이내 치료가 된다. 하지만 당장 소독이 싫고 약 바르기가 귀찮아서 방치하면 상처는 더 커진다. 사회에 건강한 비판이 필요한 것은 같은 이치이다.
우리 충청지역에 언제부터인가 비판이 사라졌다. 지역적인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나라 전체에도 건강한 비판 문화는 누그러졌다. 뭔가 따끔한 비판이 가해여야 할 사건이 터져도 침묵만 흐른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훗날 곪고 곪아 큰 상처가 돼 살을 드러내야 할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할 주체가 비판에 나서지 않으니 곳곳에서 답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비판이 사라진 가운데 민심은 빠른 속도로 집권 세력에 등을 돌리고 있다.
우리 충청지역의 경우 비판이 사라진 지 벌써 수년은 된 것 같다. 언론은 받아적기에만 몰두한 지 오래고, 시민단체도 옳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둘 다 존재감을 잃었다. 그뿐인가 시민을 대표해 지방 살림을 살펴보아야 할 의회도 비판에 나서지 않고 있다. 그저 지자체의 조력자일 뿐이고 원팀일 뿐이다. 언론과 시민단체, 의회까지 모두 침묵하고 있으니, 우리 지역 사회는 시민이 원하는 대로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다수의 시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뭔가 불만스러운데 누구도 비판하지 않으니 답답증이 커질 뿐이다.
언론의 침묵은 시민 모두의 책임이다. 신매체의 범람 이후 신문의 독자도, 방송의 시청자도 빠른 속도로 이탈하고 있다. 신문사와 방송사 모두 과거와 비교해 수익구조가 형편없이 악화됐다. 그러다 보니 지자체를 비롯한 공공기관이 가장 큰 독자 그룹이면서 뉴스 제공처이다. 그들이 집행해주는 광고수익이 아니면 신문사든 방송사든 존폐위기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사정이 이러니 대놓고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조가 됐다. 생존권 앞에 무기력해 있는 매체를 향해 비판기능을 잃었다고 나무라는 것은 무책임하다.
시민단체는 모두 알다시피 진보정권 집권 이후 존재감을 잃었다. 전국 단위든 지방 단위든 곧잘 목소리를 높이던 시민단체의 활동가 다수가 정부와 지자체 또는 그 산하기관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더는 비판의 날을 세울 수 없는 위치가 됐다. 몇몇 활동가가 그 품에 안긴 후 잔류해 있는 후배들은 선배들이 찾아 들어간 양지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형편이다. 이 같은 구조가 고착된 것은 시민단체에 후원금 한 푼 내지 않고, 그들의 자립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비판만 잘하라고 요구하는 시민들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지방의회는 어쩌다 보니 집권 세력과 같은 당 소속이 점령했다. 당초에 시민의 눈으로 비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항상 원팀이라는 공조의식만 갖고 있으니, 시민을 대신해 싸워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만 하는 것으로 비친다. 의회가 집행부의 실정에 제대로 제동을 걸어 공론화시키고 시민의 재산을 지켜낸 사례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 모든 지방의회의 임기는 끝나가고 있다.
살아있어야 할 언론, 시민단체, 의회가 모두 낮잠을 자고 있으니 속 시원한 비판은 없다. 충청지역에서 건강한 비판이 사라졌다. 사회적 관심이 큰 대형 사업을 지자체나 교육청 등 공공기관이 부실하게 처리하고 시민의 혈세가 줄줄 새는 일이 생겨도 비판은 없다. 이래저래 서로 신경 곤두세우지 않고 편하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콧노래만 부르고 있다. 비판 없이 쉽게 가니 당장은 편하고 쉽겠지만, 훗날 큰 상처가 돼 치료가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지 않을지 크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