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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유월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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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6.22 17:13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근무하는 직장 옆 공터에 작약 한 송이가 피었다. 초록 잎이 무성한 사이로 붉은 꽃잎을 펼치며 반짝반짝 사위를 빛내고 있었다. “드디어 얼굴을 보여주는구나.”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작약은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부는 미풍에 하늘하늘 고개를 흔들었다.

봄부터 여린 새싹으로 돋아나더니 하루하루 잎을 늘려가는 모습에 오며 가며 눈이 많이 가던 차였다. 꽃대가 솟아오를 땐 이제나저제나 또 기다렸다. 언제쯤 수줍은 듯 잔뜩 웅크린 채 얼굴을 덮고 있는 붉은 봉우리를 활짝 열어 보일까. 며칠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작약은 소리 없이 피어났다.

유월이면 친정집 시골 마당에도 작약이 고왔다. 옹기종기 장독들이 모여 앉은 옆으로 색색이 여러 송이가 피어나 뜰 안을 화사하게 밝혔다. 바람이 적당히 좋은 날이면 장미처럼 은은한 향을 실어나르며 지나는 이웃들마저 기웃기웃 걸음을 멈추게 했다.

마당에 작약이 들어앉은 건 선대 때부터였다고 한다. 열아홉 할아버지께서 옆 마을에 사는 한 살 아래 할머니와 혼례를 치르던 날, 마당에는 울긋불긋 꽃이 화려했단다. 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그 이야기를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회상하곤 하셨다. 열아홉, 열여덟의 선남선녀는 작약이 탐스러운 마당에서 서로의 인생에 한 획을 그으며 꽃처럼 환한 한 시절을 보냈으리라.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사랑방에 누워 계시거나 잠깐씩 앉아 창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많이 아파서 누군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돌봐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어린 마음에도 남아 밖에 나가 놀다가도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할아버지 방문부터 열어 보곤 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머리맡 문갑에서 포도를 닮은 초록색 굵은 알사탕을 내어 주며 희미하게 웃곤 하셨다.

햇살이 깊어지는 유월이면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온 힘을 다해 걸음을 내디뎌 꽃이 만발한 마당을 나서곤 하셨다. 그리고 봉당에 앉아 작약을 한없이 바라보곤 하셨다. 핏기없는 앙상한 손으로 붉은 꽃잎을 어루만질 때는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며 잠깐이나마 맑은 정신을 유지하셨다. 당신의 시각과 촉각을 총동원해 꽃을 대할 때, 아마도 가장 좋았던 한때를 떠올렸을 것이다. 고운 작약이 만발하던 시절에 만나 혼인을 하고, 어우렁더우렁 자식 낳아 기르며 살던 그때를 말이다.

할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당시 소집영장도 없이 군대에 차출되셨단다. 간단한 군사교육만 받고 그 험한 세상으로 내몰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폐함을 안고 돌아오셨다. 어느 학자는 전쟁이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고,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며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고 했던가.

할아버지께서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진 댓가는 혹독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었던 젊은 가장은 사라지고 한여름 천둥소리에도 귀를 막고, 번개라도 치는 날이면 구석으로 숨는, 평생 포탄 소리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정신 혼미한 노인으로 남은 생을 사셨다. 할아버지가 병객이 되어 돌아온 후 가족들은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서 밤을 낮처럼 모든 짐을 떠안고 가난이라는 짐을 내려놓을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걸었다니 그 삶이 오죽 고단했겠는가.

유월은 신록이 제철을 만나고 온갖 사물이 무르익는 생동(生動)의 달이다. 반면 누군가에겐 전쟁이 남긴 상처로 힘든 기억이 있는 달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젠 희미해진, 우리의 세대는 이야기로만 전해 듣는 간접의 역사지만 오늘의 평안함 뒤에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최소한의 감사함을 잊지 않는 유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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