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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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신문 dailycc@dailycc.net
  • 승인 2021.07.1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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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숙 수필가
이혜숙 수필가
이혜숙 수필가

꽃피는 춘삼월 정원의 꽃들이 봉오리를 봉긋하게 할 때, 내게 기쁨이 찾아왔다. 소중한 생명이 내 품으로 온 것이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기쁨에 어지러운 세상도 아름답게 보였다. 우주가 내 품으로 들어온 기분이랄까.

전 세계가 비상이니 어디인들 안전하랴.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다. 혼자 힘들어할 딸의 모습에 애간장만 탈 뿐 뾰족한 도리가 없다. 역병으로 인해 산후조리원이 폐쇄한다고 했다. 병원에서 곧바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얼마 만에 보는 아기던가. 걱정이 앞선다. 꼬물거리는 아기를 안을 때마다 긴장으로 온몸의 세포가 들고 일어나는 것 같다.

3월에 손녀가 태어났다. 마흔한 살의 딸이 결혼한 지 3년 만에 태어난 손녀다. 자연 임신에 자연분만으로 나이를 잊고 순산했으니 대견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나도 기뻤지만, 남편은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인가보다. 평소에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인데 아이를 보는 눈길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정한 모습이다. 그렇게 기뻐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행복이 이런 건가.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이런 귀한 아기를 안아볼 수가 있을까. 요즘은 지나가는 아이가 예뻐도 함부로 머리를 쓰다듬을 수도 없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고사리같이 앙증맞은 손을 만지며 꼬물거리는 아기를 어디 가서 안아 볼 수 있을까. 몸은 힘들지만, 남편과 나는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닌다.

그렇게 한 달을 보살피고 보냈다. 내 자식을 키울 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키운 것 같다. 그런데 손녀는 다르다. 모기만 물려도 조금만 울어도 가슴이 철렁거리고 딸에게 잔소리를 해 댄다. 제 자식 어련히 잘 키울까만 노심조차 아이의 안전에 온 신경이 집중돼 있다.

이런 상황에 맏동서가 집을 짓기 위해 땅을 장만했다. 바로 건축공사를 하면 좋으련만 동서도 외손녀를 돌봐주고 있기에 쉽지 않은가보다. 내가 손녀를 봐서일까. 동서의 고생이 가깝게 느껴진다. 방치해 둔 땅엔 풀이 산을 이룬다. 포크레인 불러서 땅을 정리했다. 묵혀두어서 그런지 동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한 트럭이나 되었다. 남편과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달려가 밭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덮어 주었다. 처음 귀촌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이번에 동서네 밭에 가서 이것저것 해 줄 만큼의 농사 실력이 늘었다. 고구마를 심고 깨도 심고 작은 비닐하우스 한 동도 만들었다.

시간 나면 아기한테로, 동서네 밭으로, 우리 농사일로 뛰어다니는 시간이 행복했다. 내가 누군가의 도움이 된다는 것이 행복했고 손녀를 보느라고 잠을 못 자고 와도 즐거웠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를 서너 달이 되어 갈 무렵 무릎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쑥쑥 쑤시듯 아프더니 걷는 데 불편했다. 좀 지나면 괜찮으려니 했는데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퇴행이 왔단다. 전에 병원에 갔을 때 몸을 아껴 쓰라고 했는데 일을 보면 끝을 봐야 속이 편한 성격 탓에 무리가 됐나 보다. 무릎을 구부리기가 불편했다. 연골 주사를 맞으며 조심조심 운동하는 수밖에 없다. 땅이 꺼질까 염려하듯 살살 걸으며 단련하고 있다. 더는 나빠지지 않으면 감사하리란 마음으로.

딸은 직장에 복귀해야 하니 손녀의 양육은 내 차지가 될 것이다. 혹시나 내 몸이 부실해서 아기에게 부족할까 염려가 된다. 친구들은 아기 봐주는 일은 힘드니 하지 말란다. 열심히 살아도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서민의 삶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해야겠지. 소중한 인연으로 내게 온 아기이기도 하지만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요렇게 작고 앙증맞은 아기를 내 손에 닿게 할 수 있을까. 할 일없고 볼품없이 늙어가는 것 보다 미래의 희망을 키우는 것도 보람찬 일이리라.

나이 들어도 건강엔 자신 있을 거란 생각으로 늘 용감하게 행동했다. 나이가 늘어갈수록 하나둘씩 여기저기 신호를 보낸다. 설악산 봉정암을 같이 다녀온 남편은 비탈길을 가볍게 뛰어 내려오는 나를 보고 다람쥐 같다고 한 지 삼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나 청춘일 줄 알았는데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조심할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 했던가 지금부터라도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건강에 신경을 쓰고 다시 젊어지진 못하지만, 누구에게도 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체력은 기르려 한다.

딸에게서 화상전화가 온다. 옆에 있어도 늘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하루에 몇 번씩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데도 늘 보고 싶은 손녀. 대학에 가는 것을 볼 수 있으려나. 백 살을 살면 저 애의 결혼식을 볼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너무 늦게 내게 온 아기와의 미래를 그리며 우주의 행복을 혼자 다 가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본다. 내 곁으로 온 파랑새를 생각하며 오늘도 땅이 꺼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걸음걸이로 산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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