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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덕이네를 위한 변명

최혜진 목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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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8.23 13:3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최혜진 목원대 교수
최혜진 목원대 교수

여성들이 세상을 살기 힘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21세를 20년도 더 넘게 살아온 우리들이 봉건시대나 20세기에서 볼 만한 일들을 여전히 겪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가부장제의 그늘이나 성차별에서 이제는 조금 자유로워질 때가 되기도 했건만, 지금도 여전히 세계는 여성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유린되는 대상은 여전히 여성과 약자들이며, 현재도 지구 어디선가는 끊임없는 여성 살인과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어 끓어오르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성리학적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삼강행실도나 오륜행실도 등을 통해 여성들에 대한 이념적 속박이 본격화 되었고, 성종시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재가 금지가 본격화 되어 법률상으로도 여성들의 삶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구속과 낙인이 많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남편을 따라 죽는 열부의 개념이 현대의 ‘미망인’(따라죽지 못한 여성)이라는 명칭까지 내려온 것을 생각해보면 한 번 정착된 편견이 얼마나 변화되기 힘든가를 알 수 있다.

우리 고전소설 중에는 ‘숙영낭자전’ ‘장화홍련전’처럼 요조한 숙녀들이 모함을 받아 핍박을 받는 사건이 많기도 한데, 이들은 죽음으로 맞서거나 혹은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 것으로 그려져 당대 여성들의 고통을 읽을 수 있다. 당대 여성들이 저항할 수단은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숙영낭자는 시부모에게 불륜으로 모함을 받자 자결을 하며, 장화 역시 낙태의 모함을 둘러 쓴 후 죽임을 당했다. 소설 속 정황이기는 하나 이러한 당대 여성에 대한 성적 규정과 낙인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았던 여성들은 ‘악녀’ 혹은 ‘추녀’라는 낙인이 동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심청가’ 속 주요 등장인물로 만나는 뺑덕이네 혹은 뺑덕어미는 아마도 그러한 대표적인 여성인물이라 할 수 있다. 뺑덕어미는 심봉사가 홀로 되자 재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원하여 시집을 온 여성이다. 불쌍한 심봉사의 재산을 탕진하고 다른 봉사와 바람이 나 도망을 가니 독자나 관객들의 지탄을 받아왔다.

그런데 뺑덕이네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녀 역시 심봉사 못지 않게 불우한 여성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먼저 그녀의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예전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 그러니 이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식 이름을 따서 붙이든지, 친정의 지역이름을 붙이는 것이 예사였다. ‘귀덕이네’ 혹은 ‘예산댁’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면 뺑덕이네는 ‘뺑덕이’라는 자식이 있는 누군가의 어미였을 터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저기를 떠돌다 홀몸으로 심봉사와 살림을 차린다. 그녀 역시 언젠가 남편과 자식이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 이전의 삶이 어떠했을 지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뺑덕이네는 고전문학에서 악녀의 표상으로 나오지만 사실 그녀가 저지른 악행은 딱 두 가지이며, 놀보의 행실에 비해서는 매우 죄질이 가볍다. 일단 너무 많이 먹어서 재산을 탕진했다는 점과 다른 봉사와 바람이 나서 심봉사를 버리고 갔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뺑덕이네 입장에서 보면 살기 위한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뺑덕어미 행실로 나타나는 ‘밥 잘 먹고, 술 잘 먹고, 고기 잘 먹고, 떡 잘 먹고, 양식 주고 술 사먹고, 벼 퍼주고 고기 사먹고’는 악행이라기보다는 식욕에 대한 한풀이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 심봉사에게 기댈 것이 없다고 판단되자 다른 봉사에게 도망가는 것 역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심봉사를 배신하고 도망을 한 것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뺑덕이네는 19세기 가부장제와 가난 속에서 떠돌던 여성 유랑인이라는 점에서 당시 처했던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남편과 자식을 잃고 떠돌던 한 여성, 가진 것 없이 의탁할 남성을 찾아야만 하는 현실 등이 뺑덕이네를 둘러싼 배경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뺑덕이네를 지탄하기에는 열심이었지만, 그녀가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보니 뺑덕이네는 비관하지 아니하고 낙관적으로 삶을 살아 나간 귀여운 악녀는 아닐까.

다시 현재를 본다. 부르카를 쓰지 않아 무참히 맞아 죽은 아프카니스탄의 여성, 동네 청년과 사랑에 빠져 가족에게 살인을 당한 인도 여성, 그들의 무지와 비문명을 목도한다. 하지만 성적 모멸감 속에 죽어 간 공군과 해군 내 여군의 죽음과 아직도 밤길과 남성이 무서운 이 땅의 여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아직도 19세기처럼 죽음으로 자신의 피해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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