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유아용품점에 가면 당연하게 파랑은 남자아이, 분홍은 여자아이용으로 구분한다. 이는 아이의 옷을 비롯해 모자, 양말 등의 의류제품과 모든 장난감 그리고 유모차에도 적용되곤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필자 또한 그 색들이 주는 이미지와 설정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나 역시 분홍에 약간의 집착을 보였던 어렸을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100여 년 전 파랑과 분홍에 대한 사람들의 색(色) 인식은 어떠했을까? 그때도 지금과 같았을까? 상황은 반대였다. 남자는 분홍, 여자는 파랑이었다. 어쩌면 분홍이 청순하고 얌전하며 나긋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요. 파랑이 용맹과 진취 혹은 통치를 뜻하는 남자다움(?)을 표방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이러한 관습적 인식은 1920년대의 유행을 선도했던 사람 몇몇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기 체면과 육감적인 감각을 투영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한 시대의 주의를 끌며 유행의 흐름을 바꿨고 이런저런 문화적 경향도 이에 한몫 더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다양한 상황과 시간의 흐름은 세기적인 신념과 가치관을 바꾸기도 한다.
코로나가 한 층 기세를 몰아 델타 변이를 일으키는 지금 이 시각 일본에서는 제32회 도쿄 올림픽(7월 21일 ~ 8월 8일)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얼굴을 내밀지 않은 올림픽 개막식 그리고 선수촌 시설물 설치나 관리 등의 문제점투성이는 소셜 네트워크나 소셜 미디어 등의 많은 매체를 통해 이미 알려진 바라 언급 자체가 무의미하다.
올림픽은 세계 평화와 화합의 장으로 경기 출전을 위해 무수한 시간을 보냈을 각국 선수들의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 장(場)인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인간의 한계점을 극복해 내는 숱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의 순간들을 보아내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가치적인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인간이 꿈꾸는 아름다움의 충족요건은 다름 아닌 운동성(역동성), 환희(도파민), 모험(도전), 현 사회적 가치이다. 무수한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보라. 인간의 한계점을 넘어 역동성과 한껏 기량을 펼치는 그들의 도전과 환희에 찬 순간순간에 관중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 한마음과 뜻으로 공감의 입을 통해 탄성을 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분홍인가 파랑인가 다시 말해 남성인가 여성인가 유색인종인가 그렇지 않은가 종교인인가 비종교인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고대에서 현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생물학적 동물의 틀을 깨고 사회적 동물로 거듭 발전했으며 사회 심리적 동물의 길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그 사회의 범주 안과 밖에서 인문학적 발현을 통해 가치의 여러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는 현재 진행형 인간이다. 현재 진행형의 시간 위에 서 있는 나는 어떤 가치적인 아름다움을 꿈꾸며 그것들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 번쯤 자문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