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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갔다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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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9.06 15:03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혜숙 수필가
이혜숙 수필가

치매를 앓고 있는 지인의 모친이 콩탕을 보내왔다. 콩을 불려서 껍질을 가려내고 갈아야 한다. 돼지갈비나 등뼈를 푹 고아서 갈아놓은 콩을 함께 넣고 끓여서 양념간장을 넣어 먹으면 되는 고단백 음식이다.

먹기엔 편할지 모르지만 만들기까지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다 보니 포항 살 때 함께 한 도반이 생각났다. 음식솜씨가 좋은 도반으로 우리가 속한 사찰의 부회장직을 맡아 궂은일을 앞장서서 하던 분이다. 말씨는 부드럽지 않지만, 속정이 깊다. 내가 음식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안 도반은 나를 집으로 초대해서 콩탕을 만들어줬다. 그때 처음 먹어봤는데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눈앞에 콩탕을 놓고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포항을 떠나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났건만 함께 한 시간은 어제같이 느껴진다.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오랜만에 통화에도 반가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일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만큼 할 이야기도 태산 같았다.

작은 암자에 적을 둔 우리는 부처님오신 날이 가까워져 오면 낮에는 행사 당일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밤이 되면 밤새워 기도도 했다. 젊기도 했지만, 함께 했기에 어려워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삼사일은 거뜬히 밤을 지새울 수 있던 불심이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서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다니던 절은 산골 암자라 가는 길이 험했다. 차를 가지고 가기도 어려운 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불법을 준수하며 바른 생각을 갖고 열심히 살자고 한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때 함께 기도하러 다니고 봉사도 같이했던 구십을 넘긴 되신 어른이 계시다. 신도회 회장직을 맡아 신도들과 함께 선방 순례도 하고 봉사도 했다. 경주 불국사 관음전에서 지인 스님이 천일기도를 한다고 해서 동참했다. 시간 될 때면 서슴없이 달려가서 기도하고 올 때면 보문단지에 늘비한 호텔 카페로 데리고 가서 나이 먹으면 주머니를 열어야 한다며 고급 커피며 맛난 음식을 사 주셨다.

세월이 무상하다던가.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원에 계신다. 전화했더니 아직도 기억력만큼은 총명하다. 코로나 때문에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절대 오지 말란다. 그 연세에도 나의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말씀에 눈물이 핑 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차게 보여서 상대도 안 했다고 하던 도반은 뒤늦게 친하게 되었다. 함께 할수록 맘에 든다며 기도하러 오갈 때 늘 다정한 미소와 배려하는 언어로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사람의 마음은 시간에 비례하는 것 같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늘 한결같은 마음이 감사하다. 언제든 와서 당신 집에서 자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젊었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포항 살 때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 열 명 정도 후원했었다. 결손가정이거나 아예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다. 공부를 못해도 좋으니 말썽부리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만 했다. 함께 기도하던 한 도반은 내가 하는 일을 알고는 절에 보시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적으로 가까이 있는 청소년들을 도와야 한다며 동참해 주었다. 그 많은 시간을 함께한 정이 새록새록 난다.

함께 했던 도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니 나이 들어감을 안타까워한다. 언제나 청춘일 줄 알았던 우리의 봄날은 갔다며 아쉬워한다. 삼십 대에 함께 했던 그분들은 이제 팔순이 되고 구순을 넘겼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그 시절로 돌아가 한창 기도하러 다니며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눈이 귀한 남쪽 나라에 어쩌다 한 번은 눈이 많이 내릴 때가 있다. 세상에서 처음 본 눈인 양 소녀처럼 감탄사를 연발하던 도반들. 장거리라 만나긴 힘들지만, 전화 한 통화로도 할 말이 많은 우리는 나이를 초월해서 언제든 목소리만으로도 반가운 도반들이다.

우리를 지도해 주시던 스님들은 득도를 위해 선방으로 다니고 있을 것이다. 지도 스님하고는 연락이 되지 않지만 이렇게 도반들만이라도 서로 연락하고 지낸다는 것에 감사하다.

역병이 끝나면 지체 말고 오란다. 내가 좋아하는 콩탕을 맛나게 만들어 준다고 하면서. 젊어서 만난 도반들은 나이 들어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제 나도 조금은 음식솜씨가 늘었다. 운전을 할 줄 안다면 우리 집으로 모시고 부족한 솜씨지만 정성 가득한 밥상을 차려드리고 싶다. 그러나 팔순의 할머니들이 어떻게 이 먼 거리를 올 수 있을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한다. 20여 년 전 이별 앞에 눈물을 보였던 도반이 지금까지도 서로를 생각하고 지낸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세상이 안정되면 바로 내려가 그간 못다 했던 이야기를 밤새 나누고 와야겠다. 비록 봄날은 갔어도 마음속 봄날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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