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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뜰 안에서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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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10.12 16:55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돌담으로 쌓아 올린 뜰 안에 가을이 깊다. 여름내 피어 있던 분꽃과 백일홍이 여전히 옹기종기 모여앉아 가을볕을 쬐고 있고 색색의 국화가 무더기로 피어 그 향이 온 마당에 흐벅지다. 한그루 우뚝 서서 담장을 넘어선 사과나무엔 지난 뜨거운 계절이 보듬어준 덕에 주렁주렁 붉은 열매가 매달려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다.

꽃과 함께 어우렁더우렁 자라고 있는 한쪽 귀퉁이 텃밭의 무는 초록 잎을 앞세워 마당의 생기를 더해준다. 좀 더 계절이 깊어 김장철이 돌아오면 속 재료로 쓸 요량으로 심어놓았단다. 지난봄 장터에 나가 사다 심었다는 생강도 어느새 푸른 줄기를 뻗어 대나무처럼 솟아올랐다. 그 모양이 신기해 손으로 이리저리 쓸었더니 잎에서 상큼한 생강 향이 묻어난다.

몇 해 전부터 가깝게 알고 지내는 지인의 마당으로 마실 나왔다. 봄볕이 완연해지는 계절이면 한 번 찾아가고 오늘처럼 가을을 느끼기에 더없이 운치 좋은 날이면 또 들러 차를 얻어 마셨다. 언제나 이리저리 쉼 없이 부지런한 안주인 덕에 이 집에서는 계절마다 요란한 법 없이 꽃이 피고 자라고 지기를 반복했고 그 한결같은 모습이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해 나는 이곳을 자주 드나든다.

어린 시절 나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꽃과 나무를 좋아한 할머니 덕분에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르는 동안 뜰 안과 밖은 늘 대궐처럼 화사했다. 가장 먼저 뒤뜰에서 개나리가 피어나고 개나리가 질 때 즈음이면 하얀 목련이 얼굴을 보였다. 이어 집 앞 개천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고 아카시아꽃 향이 산바람을 타고 계절을 알려주었다.

봄이 꽃으로 완성된다면 가을은 단풍으로 점철된 나무가 아닐까 싶다. 일찍이 우리에게 『이방인』을 쓴 소설가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는 가을을 정의함에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라고 했다. 어쩌면 묘사가 요즘 시절과 그리도 적절한지 짧은 문장 한 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장 먼저 잎에서 꽃으로 변신을 꾀하는 나무는 아무래도 봄날에 그토록 눈부시던 벚꽃 나무일 터이다. 어느새 울긋불긋 고운 물을 들여 바람을 타고 땅으로 가라앉고 있다. 연둣빛이던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하루가 다르게 황금빛 노란 물결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여름내 푸르던 단풍나무 잎새마다 햇볕이 키워낸 빨간 가을이 가득 담겨있다.

고운 단풍으로 화려한 계절이 오면 그 옛날 할머니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속없이 밀고 들어올 때가 있다. 이른 아침 할머니를 따라 집 옆을 지키는 졸참나무에서 밤새 떨어진 도토리를 줍던 기억, 한껏 까칠한 밤나무 아래서 알밤을 털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바삭거리며 들려오는 나뭇잎 밟는 소리……. 늘 그렇듯 낙엽 지는 소리는 가을이 건네는 마지막 작별의 인사 같았다.

마당 평상에 앉아 화단을 바라본다. 어떤 꽃은 이제 막 꽃봉오리를 열어 화사하고 또 어떤 꽃은 이미 지기를 시작했는지 빛이 바랬다. 길 건너 가로수에도 단풍이 한창이다. 잎에 물이 들기 시작하는 건 잠깐인 듯 급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시간 또한 스치듯 찰나리라. 피었으니 지는 때가 있는 것 또한 당연하나 그 시간이 오면 고운 잎들은 땅으로 내려앉아 흔적을 감추고 뜰 안에는 긴 고요만 남을 적막함이 미리 쓸쓸하다.

저들처럼 환하게 피었던 나의 날들은 언제였을까. 또 앞으로 꽃피울 순간들은 얼마나 있을 것이며 고요로 에두르는 쓸쓸함이 몰려오더라도 홀로 의연할 수 있으려나. 이 가을! 나는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계절이 깊어가는 만큼 생각도 많아지는 이 가을은 성찰의 계절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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