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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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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1.12.19 19:20
  • 기자명 By. 이용

1941년 2월 16일,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난 김정일.

그의 태생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서는 량강도 삼지연군의 백두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한·미·일·중의 학계나 소비에트 연방의 기록에서는 김정일이 당시 소비에트 연방 하바롭스크 지방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마을인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있다.

유년기를 유복하게 보낸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인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 국무총리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키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됐고, 그 뒤 1973년 9월까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으로 사업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김일성의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 이복 형제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평일 등과 갈등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 숙부 김영주와 이복 동생 김평일을 제치고 후계자지위를 확정지은 김정일은 그 해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고,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이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고,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거되고 이때부터 2003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된 후, 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9기, 제10기, 제11기 대의원에 연임됐다.

그리고,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고,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뒤 1992년 4월 조선인민군 원수 칭호를 받았으며, 1993년 4월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겸임조항을 정령에서 삭제하면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다.

그러나 군권과 함께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한 김정일은 이어 조선로동당의 당권도 장악했다.

초기에는 조선인민군 원수로 취임했고, 이후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자신은 공화국 원수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은 유훈통치기간을 발표했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고,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했다.

이후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에서 맡게 하되, 국방과 군권만을 자신이 장악하도록 이원제 정부를 불법적으로 계획, 구성했다.

1998년까지 국가원수의 대리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통치한 뒤 통수권은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로 넘겼으나,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로 권한이양 후에도 그는 실권자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했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또한,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특구제를 도입,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했고,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해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그는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전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됐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4일에 걸쳐 노무현 전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됐다.

이후 수많은 건강이상설과 사망설이 전해졌었던 김정일은 지난 17일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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