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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초려 이유태 선생묘역 역사공원 조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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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2.07.25 18:46
  • 기자명 By. 임규모 기자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지역인 세종특별자치 시 내 (구. 연기군 남면 종촌리 산 324)소재하고 있는 초려 이유 태 선생의 묘역이 ‘복합커뮤니티센터’ 공사로 인해 훼손되고 있다.

초려(草廬) 이유태(1607~1684)선생은 신독재, 우암, 동춘당, 탄옹 선생과 함께 충청5현 가운데 한 분으로 17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경세가이다. 초려선생은 임병양란 이후, 연이은 사화와 당쟁으로 피폐 할대로 피폐해져 있는 조선의 미래를 걱정한 유일한 지식인으로 개혁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사회의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개혁방안을 구상했던 기해봉사(己亥封事)역시, 국가 상황을 어떻게 개혁해 중흥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제시된 구체적인 사회 개혁 국가 혁신 프로그램이었다. 이에 사회각계 전문가를 초청, 초려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기해봉사에 대해서 재조명해 보고, 최근 불거지고 있는 초려선생 묘역 문화재 지정과 묘역보존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고, 세종특별자치시의 문화재 정책에 자문코자 한다.

박수현
민주통합당 충남도당 위원장·국회의원

◆초려선생의 개혁의지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초려(草廬) 이유태 선생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하신 분이 충청도의 선조로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7세기 조선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초려선생은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同春) 송준길과 더불어 삼족(三足)으로 칭해졌고, 청음(淸陰) 김상헌, 신독재(愼獨齋) 김집, 동춘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과 함께 산림5신(山林五臣) 가운데 한 분으로 손꼽힌다.

당시 개혁과 국가비전을 담은 4만여 자의 대상소문인 기해봉사(己亥封事)로 유명하고, 이는 정치의 기본틀과 국가변혁의 요체를 모두 갖추고 있는 대문장이자 후세의 귀감으로 우리 시대의 정치인, 공직자, 학계는 물론이고 사회 각계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지침서로 크게 알려져 있다.

교육에 있어 문무를 차별하지 않고 함께 육성해야 하며 농민과 서민을 위한 교육을 설파하신 점 그리고 양반가 자제들의 병역의무를 주창하신 것은 초려선생이 시대를 앞서는 혜안을 지니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 중기 사화와 당쟁의 혼란 속에서 오로지 부국강병을 강조하셨으니 그 올곧은 뜻을 헤아려 후세에 길이 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불굴의 자주의식과 함께 북벌의 기치를 세운 점은 우리가 되새길만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비록 효종의 승하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초려선생의 북벌정신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등 우리의 자주권을 침탈하고자 하는 시도들에 대하여 우리가 어떠한 역사의식과 어떠한 민족혼을 갖고 대응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초려선생의 묘역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자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초려선생 묘역 문화재 지정은 물론, 성역화 사업이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하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난 6월 8일 개최된 초려선생 묘역보존을 위한 위령고유제 및 전국유림 총궐기대회에 참석했었지만 초려선생묘역의 문화재 지정 및 성역화 사업의 국가 사회적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한다.

정부는 물론이고, 관련 지방자치단체나 단체 등도 초려선생의 뜻을 기리는 문화재 지정 및 성역화 사업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으로 역사에 길이 빛날 초려선생의 개혁사상이 세종특별자치시의 출범과 더불어 재조명되고, 계승 발전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유환준
세종특별자치시의회 의장

◆초려선생의 기해봉사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궁극적으로 유학은 경세치용을 위한 실학이라 할 수 있다.

정심수신(正心修身)이 치국평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유학을 보다 높은 차원의 정치학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정심수신만을 중시하다가 경세치용의 실무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유학자들의 정치론이 군덕론(君德論)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시무(時務)를 논한다 해도 지엽적이거나 땜질처방 식 논리에 그치고 말게 되는 것으로 요순군민(堯舜君民)과 천덕왕도(天德王道)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 스케일이 크게 시무를 논해 그 혜택이 서민의 삶에 이르도록 개진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초려의 기해봉사는 당시 조선왕조의 현실을 반영한 대개혁방안으로서 무너져가는 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워 중흥의 대업을 시도했던 시의적절한 경륜의 표출이었다고 본다. 상소문만 해도 2만여 자가 넘고 별책으로 올린 향약 책 까지 합치면 모두 4만여 자가 넘는 대상소문으로 전반부에서 당시 조선왕조의 실상과 폐단을 들고 그 원인을 규명했으며, 이어서 3강 16목의 기본틀에 따라 본격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정개혁의 3강령은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正風俗), 인재를 양성하는 것(養人材), 과거의 잘못된 폐단을 개혁하는 것(革舊弊) 등이다. 정풍속에는 향약, 오가통(五家統), 사창(社倉) 등 3가지 절목이 있으며, 양인재에는 학교, 연영원(延英院), 과거법, 오위(五衛), 군자별창(軍資別倉) 등 5가지 절목이 포함된다.

초려는 정풍속과 양인재를 통해 국가 통치의 기본 골격을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혁구폐에는 내수사(內需司), 공안(貢案), 부세(賦稅), 인역(人役), 양전(量田), 태용관(汰冗官), 구임(久任), 금치습(禁侈習) 등이 있는데 이 8가지가 시의변통과 경장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신진연구자들이 초려학의 학문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초려학(草廬學)이 중기 이후의 조선사회를 붕당과 같은 정치적 이합집산의 측면이 아닌,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새롭게 열어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초려는 청현요직(淸顯要職)의 공명을 마다하고 당시의 시대정신에 입각하여 소강(小康)이상의 차원 높은 개혁의 기치를 내세웠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광복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소강의 진전을 바탕으로 해 더 큰 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적극적인 개혁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려 학이 우리에게 주는 갚진 역사적 교훈이 아닌가?

이성우
한국고전번역원 위원·(전)연세대 문과대학원 강사

◆초려선생의 기해봉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초려 이유태 선생의 기해봉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상소문이다. 분량으로도 무려 4만여 자에 달한다. 본 상소문만 2만여 자이고, 별책으로 올린 향약책도 2만여 자가 넘는다. 상소문의 내용을 보면, 국정전반에 걸쳐 제시된 개혁 책 들이 주도면밀하게 마련돼 있어서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해봉사는 암암리에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이 초려선생을 부르자, 이에 부응하여 집필하였던 것으로 아쉽게도 정서하는 중에 효종이 승하해 당대에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현종이 즉위하면서 초려의 상소를 보고자 했으므로 조정에 올리게 됐고 현종이 눈물을 흘리며 이 상소에 제시된 정책은 다 실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한 사실이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남아있다.

상소의 전반부에서는 당시 조선왕조의 폐단을 ‘군왕이나 조정이 정치를 제대로 하고자 하는 실공(實功)이 없다’는 상무구치지실(上無求治之實), ‘국가의 정책이 백성을 구제하는 실공이 없다’는 군책무구민지실(群策無救民之實) 등 7가지로 분석했다. 대체로 율곡 이이 선생의 갑술봉사에서 추구했던 경장론(更張論)과 같은 시대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불식하고 국리민복을 확고하게 할 수 있는 본격적인 국정개혁의 방안을 3강16목(三綱十六目)으로 제시하고 있다. 3강령은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正風俗), 인재를 양성하는 것(養人材), 과거의 잘못된 폐단을 개혁하는 것(革舊弊)이다. 정풍속과 양인재는 국가 통치의 기본 골격을 구성하는 것이고, 혁구폐는 시의변통과 경장 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3강령에 속하는 16목의 내용을 대강 소개하면, 병농합일(兵農合一)의 정책, 문무병용(文武竝用)의 교육, 몽재(蒙齋)를 통한 서민교육의 중시, 양반 자제의 병역의무, 내수사(內需司) 재정의 국방비 활용, 양전(量田)의 실시, 오가통(五家統) 등이 있다. 모두가 국정의 개혁과 경제의 부강을 도모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이다.

이상과 같이 기해봉사에는 당시 조선왕조의 제반 문제에 대해 치밀하게 진단, 분석해 민생을 구하고 국력의 부강을 도모하는 개혁적인 처방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있어, 오늘날로 따지면 씽크탱크(think tank)를 구성해 전문가 수십 명이 매달려도 쉽지 않을 일을 초려선생 혼자서 해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사실, 초려선생과 같이 공심(公心)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공심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가 자신이 아닌 국가와 사회, 나아가 백성을 위해 헌신하려는 인심(仁心)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초려는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초려선생의 기해봉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심에 물들어 목전의 작은 이익에 골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진 시대적 질문이자 화두인 셈이다.

이해준
공주대 문화유산대학원장·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초려선생 유적의 역사성과 보존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죠?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儒賢

초려(草廬) 이유태(1607-1684) 선생이 충청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김장생과 김집의 문인이었고, 이 시기를 대표하던 송시열, 송준길과 더불어 삼족(三足)으로 칭해졌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인조-효종조에 나라의 큰 인재로 왕의 부름을 받아 등용된 산림오신(山林五臣) 중의 한 사람 으로써 경국의 대 사상을 체계화해 제시했던 인물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초려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정신은 ① 국가 개혁정책 설계서라 할 기해봉사(己亥封事) ② 고을단위의 사회교육론이라 할 향약(鄕約) ③ 그리고 모범적인 일반 가정의 규범서인 정훈(庭訓)으로 체계화돼 있고, 그 주도면밀함과 탁월한 현실비판과 경장 론으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선비가문의 생활 규범이자 가정교육의 요체를 정리한 정훈은 정신과 도덕적 불감증과 개인주의적 의식이 팽배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더욱 많은 가르침을 주어 학계의 번역 소개된 바도 있다.

온존된 정신사와 사상사, 유적·유물

문화재는 과거의 전통과 역사, 정신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이지만, 현재는 너무 유형의 문화재에 국한해 보존 관리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최근 들어 조금씩은 변화되고 있으나, 문화유산에는 사람과 정신,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초려선생과 같은 역사적 인물의 사상과 정신사, 문화사는 유형문화유산만을 중시할 경우, 자칫 주객전도(主客顚倒)나 본질을 도외시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본다. 초려 가에는 400여 종에 이르는 초려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전적문서들이 충실히 보존돼 있고 이중 관련고문서와 전적, 유물 중 일부는 충남도 유형문화재(104호)와 문화재자료(302호), 민속자료(제5호)로 지정돼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초려선생 가문이 유학적, 예학적 전통을 현재까지 보존해온 매우 희귀하고도 상징적인 가문이라는 사실이다. 초려 이후 대를 이은 학자의 배출로 학문이 단절되지 않은 전통 유도와 한학가문으로 저명하고, 특히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 등의 항일의병사적과 철도개설 반대, 창씨개명 반대 등으로 점철된 정신사적 전통을 실천해 왔다.

초려 묘역의 상징성과 가치

초려의 묘역은 그냥 묘소가 아니라 그 혼과 백이 있는 상징적인 곳이다. 이러한 ‘현재까지 지켜져 온 온축된 전통’의 기반이자 탯줄이기 때문에 이를 훼손하지 말고 보존해 교육적 자료로 상생·활용해야 한다. 더욱이 세종시 지역에는 초려선생을 제향 했던 갈산서원(葛山書院)이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세종시의 역사와 정신, 문화사에 큰 상징으로 포양하고 활용해야 할 문화자원인 것이다. 초려선생의 묘역보존 문제는 단지 묘소 하나쯤으로 보거나, 가문후손들이 이해로 보는 아둔함이 너무 아쉽고 답답하다. 본질적으로 첫째, 충청지역 대표적 유현의 정신사를 계승한다는 지역문화사, 정신사적인 측면 둘째 관련유적 유물과 함께 예학적 전통을 온존한 희귀하면서도 상징적 가문으로 널리 알려진 가문의 유적이라는 점에 비중을 뒀으면 한다. 또 셋째로 새롭게 건설되는 행복중심복합도시의 문화사적, 정신사적 상징성을 보강하는 데도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연우
충남민간단체공동협력센터 대표·공주대학교 객원교수

 ◆세종시 초려선생 묘역 문화제 지정 및 성역화에 대한 지역의 입장을 정리해 주시죠?

 지역민이나 유림들은 단연 문제를 제기하죠?

2004년 충남도에 연기군이 문화제 지정을 신청한 이래, 2004.4.17 ‘신행정수도건설을위한 특별조치법’이 발효되는 등 행정수도 건설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문화제 지정이 사실상 무기한 연기 됐다가 2007년 제1차 지정대상으로 선정은 됐으나 2008년 8월 행정도시건설청으로부터 업무가 이관된 후, 2008년 11월 7일 1회 실사 외에는 여전히 회의 조차 개최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 후 전국 유림들과 이 초려 기념 사업회(회장 이건정), 초려 선생유적 공원 추진 회(회장 변평섭)의 노력으로 2010년 1월과 2월 청와대 비서관, 김호재 국회의원등과 면담이 추진되고, 2010.5.10 청와대 박형준 비서관이 공원화 추진에 대한 공식입장을 천명한 바 있으나 LH공사는 2008.3.7 과 2012년 5월 7일,25일 두 차례 초려선생 묘소 이장을 통보한 상태이다.

문중은 물론, 향교, 유림들의 관계기관 방문과 문화재 지정 요청 민원은 무슨 소용인가?

2011.11.12 조선일보의 집중 취재보도이후 지역·지방언론사, 인터넷 뉴스 등에서 초려선생 묘역 성역화 및 문화재 지정에 대한 당위성 보도를 수없이 했지만 결과는 그대로이다. 2011.1.13 처음, 양측의 공식적인 회의를 가진 이후 2012.1.9과 2012.2.13 건설청장 면담과 관계자 간 회의를 재개했지만 아무 소득 없이 끝났고, 2012.3.4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 회장과 최민호 (전)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의 중재로 유림측과 건설청이 신도비 이전을 조건으로 묘역성역화 사업 추진을 약속했지만 LH공사는 이미, 묘역 700여평을 침범, 훼손해 가며 세종시 복합커뮤니티센터를 짓고 있어 이제는 공사 중단과 함께 모두에게 신뢰와 약속이 파기돼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얘기인가? 개발의 영향을 염려해 문화재 지정을 고의적으로 미루고 있는 그들에게 역사가 어떻고, 문화재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하면 과연 받아들이겠는가?

개인적으로 충남도지사를 비롯 담당자와 정·관계 인사들에게 초려선생의 역사적 평가와 초려묘역 보존을 위한 자료전달과 설명을 드렸지만 아직은 답이 없다.

유림들과 지역에서 제기하는 것은 부실한 문화유산 지표조사와 공원녹지(묘역)를 침범, 훼손해 가면서까지 세종시 복합커뮤니티센터를 짓는 것이다. 행정도시 개발사업 시행사인 LH공사 역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에 따라 문화재 지정업무가 실질적으로 충남도에서 건설청으로 이관된 2008.5.19 이전인 2008년3월7일 문화재 지정 절차가 진행 중인데도 초려선생 묘의 이장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나 그 적법성 논란과 함께 행정절차상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문화재 훼손 및 방치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역의 의견이다.

향후 문화재 보존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수립해 놓고 지키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초려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가지는 학술적, 역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유적과 유물이 가지는 문화재적 가치와 그 교육적 의미는 이미 지역과 학계에서 검증을 끝낸 상태이다.

세종/임규모기자 lin13031303@dailyc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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