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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틈의 조화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 건축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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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1.19 15:35
  • 기자명 By. 충청신문
건축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사람과 건축은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수많은 건축물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각각 다른데 무엇보다 안동 하회마을 가까이 위치한 병산서원을 접하면서 자연과 건물 사이에 빚어지는 텅 빈 공간들의 어우러짐으로 인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음을 보았다.

서원의 핵심건물이라 할 수 있는 입교당은 1930년대 다시 지어져 연대의 가치도 낮고, 배흘림기둥을 가진 부석사 무량수전 같이 특별한 조형미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건축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병산서원의 가치는 여러 동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 내는 관계에 있다.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 사이에 형성된 비어있는 외부공간들에 참된 가치가 드러나도록 넉넉한 틈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마치 사군자 그림의 돋보임은 유려한 선으로 그려진 난초의 잎 모양보다 그 선들로 분할되는 흰 여백에 문인화의 참된 가치를 읽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 건물들이 형성하는 관계이며, 그러한 건축을 집합적 건축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개개 건물의 형태적 우수함도 중요하지만, 특정 건물이 지나치게 두드러진다면 오히려 다른 건물과의 관계성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의 소박한 건물들은 뛰어난 집합적 관계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러한 집합적 건축의 성취는 비단 병산서원만의 자산은 아니다. 도산서원이나 옥산서원, 통도사나 해인사, 창덕궁이나 종묘 등 한국의 명작들이 두루 갖춘 보편적 성취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은 여러모로 병산서원과 비교된다. 서원의 두 중심인 강당과 사당의 관계는 서원건축의 형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부분의 서원들은 사당이 강당의 바로 뒤편에 자리 잡아 매우 엄격한 중심축을 형성한다. 그러나 유독 이 두 서원만은 사당이 강당의 동쪽 뒤편으로 치우쳐 배치되어있다. 피상적으로 본다면 비대칭적이고 예학적인 서원의 형식으로 어색할 것 같지만, 사당 앞의 독립된 제사마당이 강당 앞 교육용 마당과 유기적으로 연속되는 자연스러운 구성이다. 초기 성리학자들의 융통성과 실용적인 여유인 듯 두 서원에 스며있다.

건축은 공간을 연출하는 예술이다. 공간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과 같은 존재다. 그 비어있는 공간 속에서 인간의 생활이 가능하고, 그 공간을 통해 다른 풍경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초라한 정자이지만, 그 위에 오르면 비어있는 벽을 통해 온 우주 가 담겨진다.”

소식이 쓴 함허정기(涵虛亭記)와 같이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고 병산서원은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병산서원은 건축가들의 눈과 글로써 다시 태어나 건물이 없는 건축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구촌에서 살고 있다. 연암이 말하는 ‘틈(閒)’의 정설이 사뭇 마음을 사로잡는다.

“연(燕) 나라와 월(越) 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산천이 가로막고 있어야 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무릎을 맞대고 함께 앉아 있다 하여 반드시 밀접한 사이가 아니며 어깨를 치고 소매를 붙잡는 관계라고해서 반드시 마음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을 통해 ‘틈’은 실체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임을 알 수 있다.

“천장(千丈)의 둑은 개미나 땅강아지의 구멍으로 인해 무너지고, 백 척의 큰 집도 아궁이의 조그만 불씨로 인해 타버린다.”고 했거니와, 부부 간에 살을 맞대고 살아도 마음의 틈이 생기면 서로 반목하거나 헤어지게 될 것이요, 같은 직장 동료라도 마음의 틈이 생기면 멀고도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이니, 삶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건,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틈은 전혀 없어야 좋은 것일까.

기계의 양날도 서로 붙어있지만 틈이 없다면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나무와 나무사이도, 밭에 심겨진 배추와 무도 서로 틈이 없으면 자라기 어렵다. 글자와 글자도 틈이 없으면 읽기가 몹시 불편하다. 옷과 살 사이에 빈틈이 있어야 활동하기 편하듯, 마음과 마음 사이에도 여백은 있어야 한다. 여백 없는 ‘사이’는 붙어버린 양날과 같을 것이다. 적당한 ‘틈’이란 서로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숨 쉴 수 있는 관계의 여백으로 무릇 좋은 관계란 무간(無間)도 아니요, 유간(有間) 아닌 그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틈의 미학은 모든 인간의 삶과 관계에서도 눈여겨 볼일이다. ‘사이’의 의미를 인간의 보편적 일상과 대인관계 속 ‘숨 쉬는 공간’으로 그 의미를 확대하여 삶의 지혜로 삼으면 좋을 듯 싶다.

요즘 아파트에 비하면 옛날 한옥에는 틈이 많았다. 문에는 문틈이 있었고, 벽에는 벽틈이 있었으며, 문종이 자체에도 공기구멍이 숭숭하게 여기저기 나 있었다. 틈새를 가리기 위해 겨울에는 병풍을 두르고 살았고, 북풍설한 찬바람이 불 때마다 휘리릭 휘리릭 문풍지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냈던 추억이 아련하다.

자연에서 터득한 흙과 나무와 종이로 지은 집에는 웃풍이 생겨 황소바람을 견디느라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기도 했다. 그 작은 틈들이 공기정화기 역할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훈훈해진다.

지금은 기밀하게 단열을 하지만 빈틈도 재고해보는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 집을 지을 때 자연소재들이 만들어내는 그 작은 ‘틈’ 하나가 그 동안 우리가 무심히 잊고 살았던 자연과의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도 마음속에 ‘틈’을 줌으로써 유기적 의식이 개체의 마음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집과 편견에 휩싸여 마음속에 ‘틈’이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오지 않고, 마음을 식혀주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도 들어오지 않는다.

부부사이도 친구사이도 틈을 두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건물의 구조에서도,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모두 적용되는 진리이다. 문을 열어 방안 공기를 환기시키는 것처럼 ‘틈’을 통해 우주의 기운이 개체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순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상상의 씨앗들이 가득한데, 틈을 막고 건물에 안주하면 건물 자체가 갖고 있는 딱딱한 한계 때문에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그만큼 피폐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 올수록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너와 나 나아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지혜롭게 승화시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경자년 새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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