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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지휘자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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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2.02 14:11
  • 기자명 By. 충청신문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유명 교향악단 연주가 TV에 나온다. 지휘자가 있고 적게는 40명에서 많게는 90명까지 각 악기 주자들이 지휘자의 지휘를 보며 일사불란하게 연주를 이행한다.

세상이 발전해서 AI가 음악을 작곡하고 그 곡을 연주한다. 필자도 수년 전에 대전시립교향악단과 AI가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에서 협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귀에도 그럴듯한 선율과 화성이 펼쳐지고, 음악을 전공한 사람 입장에서도 꽤 수작이다.

현대에는 스마트폰으로도 작곡과 편곡 프로그램을 구동할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는 작곡된 음악에 실제 악기 음향을 적용시켜 즉시 실시간으로 음향을 체크하며 수정할 수도 있다. 현대의 음향디자인은 상당히 발달해서 전문가도 컴퓨터로 모델링 한 오케스트라 음원을 실제 연주 음원과 차이를 구분해 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난다.

이쯤 되면, AI로 작곡부터 연주까지 가능한 마당에 왜 굳이 사람이 연주하고 사람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 음악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음악가로 장 바티스트 륄리가 있다. 륄리는 한편으로 불운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당시의 지휘봉은 지금처럼 자유자재로 흔들기보다는 사람 키만 한 무거운 철제봉을 바닥에 쿵쿵 내리찧는 형태였는데 잘못해서 발을 찧었고, 결국 상처가 괴사하여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후로 지휘자들은 손만 썼고, 지휘자라는 포지션이 따로 있기보다는 악장이 바이올린 활과 눈빛으로 끌어가는 식이었다. 이건 소규모 오케스트라일 경우에는 가능했지만 고전시대를 거쳐서 낭만시대에 이르러 오케스트라 규모가 커지고 나서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져서 작곡자가 주로 지휘를 맡았다.

낭만시대에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유명했던 멘델스존은 현대의 길이와 비슷하게 짧아진 지휘봉을 썼다. 바그너와 리스트 시절엔, 망명 중인 바그너를 대신해서 그의 오페라 ‘로엔그린’ 초연을 리스트가 대신 지휘했는데, 초연 연주시간 기사를 바그너가 읽고는 너무 느리게 연주했다고 리스트에게 편지로 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10여 년 후에 바그너는 리스트가 지휘했던 초연의 느린 템포가 음악적으로 더 나았다고 인정하게 되어, 곡을 창조한 작곡자라도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을 수용하며 곡의 완성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스 폰 뷜로우 부터는 전문 지휘자의 시대가 열린다. 그때까지 지휘는 작곡가의 영역이었는데 이제 곡을 작곡한 작곡가를 넘어 음악을 해석해내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지휘자가 탄생한 것이다. 음악의 발전에 따라 역할과 방식이 달라진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게 지휘자의 역사는 4세기를 거치며 서서히 확립되었다.

같은 작곡가의 음악이라도 지휘하는 지휘자에 따라 천차만별의 음색과 템포, 그리고 해석이 부여된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작품이라 생각했던 곡들이 지휘자가 바뀌면 전혀 다른 곡이 되어 생동감 있고 긴장감 있게 바뀌는 마법이 일어나기도 한다. 단순한 음의 조합이 아닌 전체 작품의 방향성과 색깔마저 지휘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고 빛깔이 부여된다. 같은 재료와 레시피로 만들어도 전문 셰프의 손길을 거치면 완전히 다른 경험의 음식으로 태어나는 경우처럼.

대항해 시대의 조지 앤슨 해군 제독의 에피소드가 있다. 남미 남쪽 해안을 돌아 대서양을 거쳐 태평양으로 가야 하는 선단이 폭풍우를 만나 방향을 잃고 괴혈병으로 선원이 매일 죽어 나가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수십일을 헤매며 필사적으로 항로를 찾는 동안 결국 선원 대부분이 죽었다. 충격적인 것은 며칠 전 항해하던 선로에서 이틀만 더 가면 생명줄이 될 중간 기착지인 후안 페르난데스 섬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판단 착오로 뱃머리를 돌려서 헤맨 끝에 원래 남미 해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떤 선장이 선단을 이끄는지로 선원들의 생사가 갈리곤 했다. 바로 지휘자의 역할이다.

AI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운용하는 시대가 올 기세다. 창작의 영역에도 벌써 많은 사례가 나타나서 AI가 작성한 기사를 일반 독자들이 구분해 내지 못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인간과 AI를 구분해 내는 튜링 테스트의 초기 단계를 통과한 AI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각각의 악기 주자들의 감정 상태와 훈련상태를 유기적으로 조율하고 연주를 주관적인 해석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지휘자의 방법과 해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것을 각각의 관점과 해석으로 이해하는 청중의 역할도 AI 시대에 여전할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마저 대신할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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