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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작은 거인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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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3.01 13:3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혜숙 수필가
이혜숙 수필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살까. 세어보진 않았지만 살아온 날만큼 많은 인연들이 오고 갔을 것이다. 많은 만남 중에 나쁜 인연도 많을 것이다. 좋은 인연만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문밖출입이 어렵다 보니 좋은 추억을 함께 한 인연들이 생각나며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작약이 희다 못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고 신록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더니 빨간 앵두가 눈을 유혹하는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왔다. 작은 체구에 앙다문 입은 지켜야 할 비밀이라도 있는 듯 다부지게 닫혀 있었다.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똑 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망울은 나를 안타깝게 했다.

우리는 글 도반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났다. 만남이 더해갈수록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글공부를 마치고 차 한 잔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된 어느 날. 내가 편안해 보였는지 아니면 의지가 되었는지 자기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가슴에 꽁꽁 묻어주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얼마나 짠하던지. 강인한 척하며 누구에게도 아픔을 내보이려 하지 않던 그녀가 짊어진 짐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이승과의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었단다. 아들을 찾는 아버지를 위해 달려오던 오빠는 오는 도중 교통사고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과 이별하게 되었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뿐인 오빠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과 하직했으니 그녀 가족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오며 눈물이 났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빠가 떠난 후 아버지도 아들의 뒤를 따라갔으니 졸지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엄마는 어땠으며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그녀와 자매들은 어땠을까. 불행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엎친 데 덮친다더니 오빠의 하나뿐인 아들인 조카마저 심장마비로 먼 나라로 갔단다. 삼대가 한꺼번에 먼 나라로 가버리고 남은 가족들은 커다란 돌덩어리를 가슴에 얹고 살게 된 것이다.

무엇으로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녀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까. 지나간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처연히 받아드려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옆에 있어 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아 매우 기뻤다.

모든 것에 적극적이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많은 그녀. 무슨 일을 맡기면 척척 알아서 잘한다. 문인협회 일을 볼 때 그녀를 재무로 추천했는데 한 푼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결산을 했다. 똑똑하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라며 스스로 만족했다.

효녀인 그녀는 마음의 상처가 많은 엄마를 극진하게 모신다. 친정엄마뿐이면 모르지만,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에게도 극진하다. 봉제사는 물론 시댁 어른에게도 정성을 다하며 종부 역할도 거뜬히 소화해 낸다. 자기가 맡은 일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척척 한다. 집에서 놀면서 그러면 대단하다 못하겠지만 주야로 일하면서 주변 지인들까지 챙기다 보니 정작 본인은 아파서 병원을 들락거린다.

한번은 밤새 끙끙 앓다가 아침에 전화를 했다. 운전할 힘도 없으니 병원에 좀 데려다 달라고. 진즉 전화하지 않고 밤새 앓았냐며 오히려 애가 탄다고 한다. 야간 일을 하고 와서 잠에 취해있을 시간인데 싫은 기색은 하나도 없다. 내가 입이 아파 매운 것을 먹지 못한다고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어 와서 보살펴준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나를 친언니처럼 생각하며 자매처럼 지내게 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즐거움과 고통도 함께 나누게 되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주위를 챙기는 마음이 너무 예쁜 사람이다. 자기 몸이 힘들어서 병원을 들락거리면서도 자신보다 주변을 챙기는 그녀를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허락될 때면 함께 여행도 한다. 누군가와 떠나는 것에 부담이 되어 혼자 곳곳을 누비며 다녔는데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함께 하는 여행의 맛을 느끼고 있다. 운전하는 나를 위해 편안하게 배려하면서 혼자가 아닌 둘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힘든 일을 하면서 수필을 써서 등단하고 각종 자격증도 취득하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회사 일도 힘들 텐데 잠을 줄여가며 자신에게 투자하는 모습은 힘들고 귀찮으면 안 하는 게으른 내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자신보다 주변을 더 살피는 그녀는 작은 거인이다.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우연이라면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것은 서로의 노력이라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는 세상에 고운 마음으로 다가온 작은 거인이 와인을 한잔하자면서 왔다. 인생의 맛과 닮은 쓰고 떫고 새콤한 와인을 마시며 인생의 쓴맛을 넘기고 달콤한 맛을 느끼며 내일의 희망을 품는다. 작은 거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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