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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름다운 청년 윤봉길을 기억하며-4·29 윤봉길 의거, 89주년을 맞아

이원복 대전지방보훈청 송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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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4.28 16:3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원복 대전지방보훈청 송무팀장
이원복 대전지방보훈청 송무팀장
4월의 햇살이 따사롭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꽃비가 휘날린다.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봄꽃은 왜 그리 아름다운지 그야말로 잔인하게 아름다운 4월이다. 그러나 그 해 꽃다운 스물다섯의 마지막 계절에 그는 젊음과 결의로 고국의 독립을 위하여 강을 건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여러 계절의 내가 여기에 서있고, 그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이내 겸허해진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사람, 학교 교과서에서 신문방송에서 늘 접하던 사람, 내가 만난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이다. 그의 덤덤함이 곧 설렘이고, 이 덤덤함으로 두려움을 이겨냈을 것이다. 누군가의 귀한 아들로 고국의 독립을 위해 강을 건넜을 젊은 청년,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 비하니 그의 결기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고 여전히 안타깝다.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거행한 지 89주년이 되는 날이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는 당시 침체의 늪에 빠진 우리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놓았다. 1932년 4월 29일 김구 선생님이 단장으로 있던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 의사는 일왕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경축식을 상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거행하자, 그는 거사를 계획하고 단상으로 접근해 폭탄을 던져 일본의 수뇌부를 폭사시킴으로써 우리민족의 항일 투쟁운동의 건재함을 알리고,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드러내는 커다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의거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한 정도로 어렸다. 그 어린아이들과 고향의 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친다. 나의 상상 속에는 떠나는 남편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아이 업은 아내와 그 옆에 어머니의 안타까운 뒷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꽃다운 스물다섯의 마지막 봄을 보냈던 의거 전날 밤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거 직전 김구선생에게 남긴 윤봉길 의사의 유서를 읽노라면 그의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기의 영달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후략)“라는 마지막 그의 당부는 그가 조국을 위한 죽음 앞에서 얼마나 비장했으며 의거를 자기의 운명으로 받았들이고 있는 담담함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결의가 이 시대를 살고있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띄우는 당부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거일인 4월 29일 아침 김구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는 찬바람을 뚫고 세상에 향기를 내뿜는다는 매화의 고귀한 기품과 충의정신을 뜻하는 호(號) 매헌(梅軒)과 닮았으리라.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며, 그해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당시 윤 의사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은 나에게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무릎을 꿇린 채 처형함으로써 일제가 그의 기개를 꺾으려 했고, 총탄이 너무나도 정확히 그의 이마를 관통한 것을 보면서 나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그의 태도는 극히 침착하고 의젓하였다고 전해지니 그 결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곧 그의 스물다섯의 마지막 외로웠던 가을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온다.

처형 후 그의 유해는 쉽게 찾기 힘든 후미진 야산에 버려졌고 이렇게 외롭게 누워있는 스물다섯의 청년은 광복 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한국으로 송환되어 1946년 6월 30일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4월의 봄은 찾아왔다. 여러 계절이 지나면서 주변에 핀 들꽃, 나무, 바람들은 그의 친구가 되어 줬을까? 스물다섯의 청년 윤봉길, 우리는 그의 마지막 길이 더는 외롭지 않게 그의 죽음이 얼마나 고귀하고 당당하였는지 세상에 말해주어야 한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면 그에게는 조국을 지키고 역사에 부끄럽지 않는 것이 용기였으리라!. 그가 그토록 원했던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봄은 우리에게 찾아왔다. 우리는 윤봉길 의사 의거 89주년을 맞아 스물다섯에 멈춰버린 그의 봄날이 찬란했다고, 그의 삶은 아름다웠다고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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