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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의 토성(土城)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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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6.13 16:4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아들 생일이라 가족이 모처럼 상경했다. 객지에 있는 아들에게 엄마가 미역국이라도 끓여주어야 한다며 서둘러 올라온 것은 자식에 대한 한결같은 어머니의 모성애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가슴 찡한 생일 축하는 가족애의 이야기꽃으로 이어졌다. 듬직한 아들을 보니 대견스럽다. 모쪼록 사회에 이바지하는 아들이 되길 소망해 본다.

밤늦게 한강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이국의 풍광을 보는 듯 오색찬란하다. 물과 다리가 어우러지고 롯데빌딩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참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몇 년 전 돌아봤던 풍납토성(風納土城)을 추억하며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에 강(江)의 물결 따라 설렘이 인다.

한강 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은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백제 때의 토성이다. 원래는 둘레가 4km 정도이나,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유실되어 현재는 2.7km 정도가 남아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의 성으로,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구축한 순수 평지토성이다.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토성은 현재 한강 변에 연한 서벽을 제외하고 북벽과 동벽, 남벽 등이 남아 있다.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가장 하단에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지고 하부 폭 7m, 높이 5m 정도의 사다리꼴 모양 중심토루(中心土樓)를 쌓았다. 안쪽으로 사질토와 모래, 점토다짐과 뻘흙을 위주로 판축토루(版築土樓)를 비스듬하게 덧붙여 쌓았다. 그중 마지막 토루(土樓) 상면에는 강돌(川石)을 1겹씩 깔아 3단으로 만들고, 그 안쪽으로는 깬돌(割石)을 1.5m 이상 쌓아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석렬 및 석축은 토사의 흘러내림과 안쪽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배수의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풍납토성은 그 축조 시기가 한성 백제 시대 초기라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의 고대 도성인 낙랑토성(樂浪土城)이나 고구려 국내성(國內城) 등에 비견된다. 한강에 직접 연해 있는 풍납토성의 입지 조건은 각기 대동강과 압록강에 연해 있는 도성들과도 유사하다. 또한 주변에 그와 관련된 고분군과 요새로서의 산성 등이 구축되어 있다는 점 등도 초기 도성의 조건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의 인구 규모나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이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토성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은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에 완성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렇듯 서울에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고 청주에는 일출보다 일몰이 아름다운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정북토성(井北土城)이 있다. 정북토성은 삼국시대 성지로 1999년 사적 제415호로 지정된 곳이다. 청주 북쪽 미호천 연안에 펼쳐진 평야의 중심에 위치한 평지 토성이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조 20년(1744년)에 상당산성의 승장으로 있던 영휴가 쓴 상당산성 고금 사적기에 정북토성이 후삼국의 쟁란기인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민가 신축 시에 돌화살촉과 돌창, 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성의 위치와 주변 여건이 비교적 성곽으로서의 초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삼국시대 전, 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평지(平地)에 지은 정북토성의 평면은 좀 기다란 네모꼴인 장방형(長方形)에 가깝다. 둘레는 655m에 이른다. 곡성을 갖춘 고대 평지 토성인 정북토성은 기초가 되는 터를 따로 쌓지 않고, 제바닥부터 4m 높이로 지어 올렸다. 이른바 판축기법(版築技法)을 써서 지었다. 판축은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널빤지를 대어 흙다짐으로 성벽을 쌓는 고대의 토목공법이다. 그런 흔적은 모두 발굴과정에서 확인되었다. 흙다짐에는 주로 황갈색 개흙이 들어갔다.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두드림무늬 토기(打捺文土器) 따위의 유물이 서문(西門)자리 곡성 아랫도리 흙다짐에서 나왔다.

정북토성(井北土城)은 서울 몽촌토성(夢村土城),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더불어 남한지역에 얼마 남지 않은 평지 토성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도 이 토성이 미호천 변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그 물을 이용하려는 조상들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최근 '미호천(美湖川)'의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14년 일제 강점기에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강(江)을 천(川)으로 격하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이유에서다. 옛 문헌 해동역사에 기록된 대로 ‘동진강(東津江)’으로 바꾸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미호천’이라는 명칭은 명백한 일제 잔재로 이것을 불식시키기 위해선 우리 조상들이 부르던 '동진강'으로 명칭을 바꿔 강(美湖江)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진강은 이미 마을과 지역을 넘어 증평, 진천, 음성, 청주, 세종 등 여러 도시 문명을 잉태하고 문화적으로 융합시켜 온 광역적 젖줄임이 명백하다. 미호천의 명칭을 동진강으로 복원하여 무엇보다 문화도시 청주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부에선 수량이 적어 강으로 불릴 수 없다고도 하지만 미호천보다 유역면적과 유로연장이 작은 태화강도 제구실을 잘 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사에 의하면 미호천은 강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유역면적과 유로연장을 가지고 있다.

선조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생각하며 한강 변의 풍납토성, 우리 고장의 정북토성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유산인가를 다시금 새롭게 인식해야 하겠다. 아울러 미호천이 동진강(東津江)으로 복원되어 중부권 최고 문화 발달지로서의 위상과 일제에 의해 훼손된 지역 문화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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