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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없던 아이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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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6.14 14:53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혜숙 수필가
이혜숙 수필가

아카시아 꽃이 향기를 날리며 온 산천을 하얗게 수놓았다. 꿀벌들은 쉴 새 없이 꿀을 모으는 것을 보니 양봉 농가의 흐뭇한 미소가 생각난다. 어두운 상황에도 꽃들은 내 마음에 빛을 가져다준다. 꽃향기에 취해 뜰 안의 꽃들과 유희를 즐기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초등 친구이기에 많은 추억을 공유하기에 자연히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을 꺼내게 된다.

우리는 중학교에 가기 위해 시험을 쳐야 했다. 어려웠던 시절, 지금처럼 학원이나 과외는 꿈도 못 꿀 시골 학교 아이들은 중학교 진학반과 비 진학반으로 나뉘었다. 진학반 아이들의 실력이 걱정된 선생님께서 과외를 해 주셨다. 여름에는 교실에서 자고 찬 바람이 불면서 사랑방이 넓은 친구 집에서 자면서 공부를 했다. 열정이 충만했던 선생님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애를 쓰셨다.

많지 않은 진학반 아이들은 선생님의 열정 속에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개구쟁이 짓도 참 많이 한 것 같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대지를 환하게 하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림자까지도 선명하게 보이는 보름날. 그날 남자애들이 고려장에서 해골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신문지를 깔고 해골을 올려놓았는데 두 눈, 코, 입이 뻥 뚫려있고 치아가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뒤통수 쪽은 가는 실뿌리 같은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처음 보는 해골에 치아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남자애들은 가지고 올 때와는 달리 무섭다면 뒤에 물러나 앉아 있었다. 나는 무서움은 어디 가고 호기심 발동으로 나무젓가락을 들고 치아를 건드렸더니 주르르 떨어지는 것이었다. 해골에 방에 두고 아이들이 둘러앉아 날이 밝으면 교실에 가지고 가자고 했다.

여기까지였다면 괜찮았는데 잠시 후 일이 벌어졌다. 친구 아버님이 들어오셔서 이런 겁 없는 녀석들 보라며 호통을 치셨다. 당신이 오랫동안 염을 해서 아는데 이렇게 깨끗한 해골은 못 보았다면 작고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라며 당장 가지고 왔던 곳에 갖다 놓으라 하셨다.

보름달은 밝아 걷기엔 괜찮았지만 한밤중에 해골을 들고 산에까지 간다는 게 얼마나 소름이 끼쳤을까. 그렇다고 어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으니 해골을 들고 나가는 남자애들의 엉거주춤한 모습은 이제 와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남자애들이 다 나가고 없는데 장롱에서 남자아이 한 명이 나왔다. 여자애들은 너 왜 안 갔냐고 했더니 무서워서 장롱에 숨었단다. 꽤 귀엽게 생긴 친구였는데 지금도 겁쟁이였던 그 친구를 만나면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웃는다.

내 친구들은 나를 깡패라 불렀다. 얌전하진 않았지만 활달한 성격의 나는 머슴아들의 개구쟁이 짓을 가만히 볼 수가 없었다. 처음엔 억울해도 넘어갔다. 참고 넘어가 주니 여자애들이 놀기만 하면 훼방을 놓았다. 고무줄놀이를 하면 와서 고무줄을 끊었고 공기놀이를 하면 공깃돌을 가지고 갔다. 핀 따먹기를 하면 흐트러뜨리는 심술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가서 일렀다. 그런 것은 너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다. 선생님께 일렀더니 누가 너희를 괴롭히는 거야 하며 역성을 들어주셨지만 머슴아들을 나무라진 않았다. 의협심이 강했는지 아니면 남자 같은 기질이 있었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애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싸운 것이 그때쯤 일게다. 여자애들은 삐치지만, 남자애들은 한 번쯤 다투어야 끝이 나는 것 같다. 유머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던 나에게 약 올리며 능글거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만하라고 했지만 듣지 않자 수업을 마친 후 두들겨 패주려는데 친구가 도망가자 화가 풀리지 않아 책보를 물에 던져버렸다.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이 별로 없던 때라 보자기에 책을 싸서 들고 다니던 때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땐 용기라 생각했다. 동창회 때 그 친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너 보고 싶어 참석했다면 반가워했다. 피해를 봤어도 늘 생각나는 친구라고 했다. 물론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사과했다.

하굣길에 집으로 가려면 통나무 다리를 건너야 했다. 남자 동창 두 명이 중간에 앉아서 비켜주지 않는 거였다. 일단 한번은 참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네들도 지쳤는지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를 건너면 둑길이 나온다. 그들은 거기서 또 길을 막았다. 너무 화가 난 나는 검정 고무신 한 짝을 벗어들고 남자 동창의 얼굴을 가격했다. 뜻밖의 공격에 당황한 그 친구는 두 번 다시 나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아주 별난 친구였기에 그 소식은 그다음 날 학교에 퍼지면서 깡패란 별명을 얻었다. 훗날 친한 친구가 된 그들은 지금도 가끔은 깡패라 부르지만 깨복쟁이 친구들 말이라 더 정겹다.

그렇게 겁이 없던 소녀는 어느덧 할머니가 되었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은 점점 말을 안 듣고 힘도 빠지니 겁 없던 아이는 열정도 사라지고 겁도 많아진 것 같다. 그때로 돌아가면 지금도 산속 오두막에서 혼자 잠을 자고 밤길도 혼자 걷는 겁 없는 소녀일까. 친구와 수다로 추억 속으로 멀고도 긴 여행을 한 것 같아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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