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묘비 사이를 걸으며

장홍석 국립대전현충원 주무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21.06.23 15:38
  • 기자명 By. 충청신문
장홍석 국립대전현충원  주무관
장홍석 국립대전현충원 주무관
봄 햇살이 눈부신 날, 묘역을 걷다가 물건에 반사된 햇살에 나도 모르게 어느 묘비 앞에 멈춰 섰다. 비석 위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었고 길게 늘어진 이어폰 줄이 비석 앞면에 닿아 있었다.

핸드폰은 낡고 흠집이 많았다. 고인이 보고 싶어서 유가족이 놓고 간 것으로 보였다. 고인의 이름 석자 앞까지 이어폰을 길게 늘여놓은 걸 보면 하늘나라에 계신 고인과 무척 얘기하고 싶었나 보다. 집에 가서 전화 걸면 혹시라도 받지 않으실까 하는 유가족의 슬픈 기대감이 느껴졌다.

따스한 봄 햇살의 길을 따라 묘역을 걷고 걸었다.
○○○의 묘, 출생 1997년 5월, 사망 2005년 7월
○○○의 묘, 출생 1991년 12월, 사망 2020년 7월
○○○의 묘, 출생 1973년 10월, 사망 2017년 5월

첫 번째 묘비의 안장자는 8살. 두 번째 안장자는 29살, 세 번째 44살.
어느 죽음인들 슬프지 않으리라만, 특히 짧은 생을 살다간 고인의 묘비 앞에서는 가슴이 더욱 먹먹해진다.

묘비 앞에는 투명한 유리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생전에 쓰던 모자. 사진, 야구공, 인형 등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었다. 액자 속의 사진을 보면 너무 앳된 얼굴. 웃고 있는 아이들과 아빠 그리고 아내. 가을 단풍 속 어느 여행지에서 멋진 포즈의 모습 등…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언젠가 묘역에서 만난 어느 병사의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저녁이 되면 ‘엄마’하고 아들이 돌아올 것만 같아서 차마 옷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매일 저녁이면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밥 차려놓고 기다리곤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며 아들 비석 앞에 앉아서 하얀 소매로 눈물을 훔치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의 시계를 차고 1년 넘게 비석을 정성스럽게 닦으셨다. 영하의 추운 겨울에 물 적신 수건을 잡고 시린 손으로 아들의 얼굴인 양, 비석을 닦고 닦아서 반짝반짝 빛났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이 보고파서 1주일에 3, 4번씩 찾아와서 몇 시간씩 묘비 주변을 한참을 서성이셨다. 아버지의 수많은 발자국으로 잔디가 잘 자라지 못할 정도였다.

죽음은 삶에게 말한다. 너는 생전에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었냐고? 어떤 삶을 살아왔냐고? 누구를 위해 살아왔는가?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는가? 희생하는 삶을 살아왔는가? 나라를 위해 살아왔는가? 삶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건지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비석으로 보이지만 각자 다른 삶과 죽음을 품고 있다. 그리고 여기 잠들어 계신 분들의 공통점은 국가와 타인을 위해 살았다는 점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 땅을 위해 헌신했던 호국영령의 희생과 유가족의 눈물을 기억하며 가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