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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깊은 농부의 집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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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8.31 14:3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어느새 시간은 여름을 지나 가을의 경계에 서 있다. 늦여름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나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완연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서늘한 기온에 얇은 겉옷을 찾게 되고 맹위를 떨치던 한낮 불볕더위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해가 지고 난 뒤 한 집 두 집 여름내 열려있던 창문이 하나씩 닫히기 시작하는 걸 보면 예로부터 내려오는 절기(節氣)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지난 주말에는 읍내 외곽에서 고추농사를 짓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올해 고추를 수확해서 빻아놨으니 직접 와서 보고 구매하라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고구마밭의 넝쿨이 어찌나 실한지 순도 따고 자잘한 채소들도 챙겨가라며 오랜만에 소식을 전했다. 몇 년째 이 집에서 고춧가루를 공수해 겨울 김장도 하고 한해 양념으로 먹고 지내온지라 서로 허물없이 지내며 늘 이맘때가 되면 연락이 오곤 했다.

여름 한낮 소나기 같은 시원시원한 성격의 집주인은 수년 전 서울에서 이사를 왔다. 처음엔 그저 복잡한 도시 생활에 지쳐 내려왔다며 몇 년만 살다 가리라 했는데 그 세월이 어느새 강산을 변화시킬 만큼의 시간이 되었단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막막하기만 했던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우왕좌왕이었으나 마당에 심어놓은 사과나무 한그루가 해마다 열매 맺는 걸 보고 그 풍경이 좋아 아예 눌러앉았단다.

느지막이 집을 나와 제과점을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그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 대문에 들어서니 마당 가득 평상과 돗자리마다 빨간 햇고추가 하늘을 향해 빼곡히 누워 볕을 즐기고 있다. 그 색이 어찌나 붉던지 서산을 넘어가던 붉은 노을이 발걸음을 되돌려 돌아온 듯 눈이 부셨다. 엊그제 모두 땄다던 집 앞 고추밭은 또 그새 빨갛게 익어 어느 규수 댁 젊은 처자의 댕기를 모아놓은 듯 온통 붉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시골 친정집에도 이맘때면 고추를 말리느라 마당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한창 고추가 익기 시작하는 요맘때면 아버지는 엄마와 단둘이서 그 넓은 밭에 새벽부터 나가 익은 고추를 따고 해가 서산을 넘어 어둑어둑해서야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소일하고, 다음날은 일일이 수돗물에 씻기를 한나절, 그리고 고추 말리는 기계에 넣고 또 한나절을 기다리면 빛고운 건고추가 되어 나왔다. 그러면 또 마당 가득 멍석을 깔고 볕에 하루를 말려 방앗간에 가져가면 보드라운 고춧가루가 되어 일 년 내내 자식들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다. 서툰 글씨로 일일이 자식들의 집 주소를 적어 택배를 보내셨고 자식들은 부모님의 땀으로 탄생한 고운 고춧가루로 김장을 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맛볼 수 없게 된 고춧가루. 부모님은 이제 고추 농사를 짓지 않으신다.

마당에 앉아 평상 가득 널어놓은 붉은 고추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골집 친정에서의 기억에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대부분의 일에서 손을 놓아야 할 만치 기력이 쇠해진 부모님을 위해 이젠 해마다 이 집에서 고춧가루를 사 보내드린다. 하루를 이틀처럼 평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은 가을이면 늘 마당 가득 고추며 들깨, 참깨를 수확해 널어놓고 자식들 먹거리를 챙겼다. 부모님이 농부라서 얻게 된 혜택에 대한 감사가 지나 보니 셀 수도 없이 많다.

안주인은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준다. 그리고 좀 더 계절이 깊어지면 또 놀러 오라며 대문 너머 길 끝까지 배웅해 준다. 그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는 고마운 인연이다.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시집간 딸네로 이것저것 보내주는 재미로 산다는 이분, 문득 수필가 목성균 선생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나는 농부가 절대로 자신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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