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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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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10.11 16:1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혜숙 수필가
이혜숙 수필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나 보다. 창문 앞에서 자기들만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귀뚜라미의 합창이 정겹다. 환한 보름달 아래서 듣는 귀뚜라미의 합창은 가을 타는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휘젓고 있다.

나이 들면 감성도 무디어지는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깊어지는 것 같다. 가을만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내 마음을 아는 듯 달님은 더 깊숙이 나에게 다가온다.

살아온 세월만큼 마음이 느긋해지고 타인을 이해하는 폭도 더 넓어지는가 보다. 모든 것에 처연해지면서 건강히 살다가 마지막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리라 마음먹는다. 욕심을 서서히 사라지면서 如如하게 사물을 보게 된 것 같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건강하게 살려고 열심히 운동하며 지냈는데 그것도 욕심이었나. 터널증후군이 오더네 무릎 연골도 삐걱거린다.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부실해지는 건강이지만 함께 아끼고 조심하고 살자고 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남편도 병원하고 친하게 된다. 작지만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다. 건강을 자신하던 사람이 이제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의술의 도움을 자주 받고 있다. 건강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아끼며 살아야 하는가 보다.

소중한 생명이 나에게 맡겨졌다. 손녀가 집으로 온 것이다. 직장에 나가야 하는 딸은 자기 집에서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비쳤지만 난 서울이 답답하고 복잡해서 싫다. 베이비시터들의 나쁜 소식이 난무하다 보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 남의 손도 빌리지 못하겠다. 남을 믿을 수 없으니 힘들지만,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보름달은 베란다를 지나 거실에서 자는 작은 보물의 머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축복한다고 속삭인 듯 달빛에 맑고 깨끗한 얼굴이 더 예쁘게 보인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자는 보물의 얼굴에 내 볼을 갖다 대 본다.

아기들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는데 내 손주라 그런지 힘들어도 예쁘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지는 것 같다. 자다가도 보고 싶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아기에게 다가가 얼굴을 보곤 한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젊을 때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는 욕심 없이 즐겁게 살자 했던 내 마음이 변했다. 손녀가 내게로 오면서 조금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 것이다. 아이가 대학생이 되면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일 텐데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삼십 정도에 아이가 결혼한다고 치면 백 세를 바라보는 나이인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아무리 장수하는 세상이라지만 자신이 없다.

갑자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진다. 손녀와 좋아하는 여행도 하고 싶고 맛집 순례도 하면서 많은 추억을 쌓고 싶은데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늦게 시집간 딸이 조금은 서운해진다. 내 말은 들은 딸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엄마는 충분히 장수할 거라고 위로하지만 자신은 없다.

여백이란 노래에 ‘내 손에 주름이 있는 건 기나긴 내 인생의 훈장이고 마음에 주름이 있는 건 버리지 못한 욕심에 흔적’이란 노랫말이 자꾸만 입에 맴돈다. 마음에 주름이 많더라도 욕심을 부리고 싶어진다.

나를 아는 주변 지인들은 자유로운 영혼이 꼼짝없이 갇혔다며 안타까워한다. 마음만 내키면 차를 몰고 휙 떠나서 가고 싶은 곳 둘러보고 오기도 하고 맛난 것 먹으러 다니기도 하던 내가 갇혀버린 꼴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이 있으니 무엇보다도 행복하다.

오랜만에 내 집을 찾은 동창생은 내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낯설다면서 내 건강을 걱정한다. 친구들의 건강이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보아온 동창생의 마음이다. 친구 동생도 나처럼 손주 보느라고 건강이 안 좋다면서 조심하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간다.

가끔은 답답하기도 하다. 집안만 맴돌 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마음이 우울해 지려한다. 역마살이 도지려고 하는 것 같다. 역병만 없다면 아기 데리고 나가서 꽃향기도 맡게 해주고 자연을 보여주면 난 콧바람을 쐬면 좋을 텐데.

세계인이 모두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어려운 이 시기에 아기를 돌보느라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해도 나뿐만이 아니라서일까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다만 색소폰을 불지 못한다는 것이 흠이다. 아기가 큰 소리에 놀랄까 봐 아예 가방에 넣어두고 꺼내질 못한다. 남편은 황토방에서 소리죽여 연습하지만 나야 24시간 아이와 함께해야 하기에 그럴 수 없다.

모든 것이 일단정지다. 우주는 아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나의 활동은 모든 것이 스톱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못하고 있다. 한 생명을 키우는 일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가 눈뜨면서 시작된 하루는 저녁에 아기 목욕시키고 분유 먹이고 재우고 나서야 근무(?)는 끝이 난다. 잠들기 전 이렇게 넋두리를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복 받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오래 살길 바라는 것은 바람일까 마음에 주름이 가득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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