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민중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향토민요’ 혹은 ‘토속민요’라고 굳이 구별해서 부른다. 그것은 전문소리꾼들이 각색해서 부른 ‘통속민요’와 일제강점기 새롭게 창작된 ‘신민요’가 여러 층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요는 민요로되 누가 부르느냐, 어떤 내용이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민요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민요’라 할 때는 전문성이 없는 일반 사람들이 구전을 통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을 가진다.
향토민요라 할 지라도 지역이나 방식, 가창자 등에 따라 노래는 매우 다양하다. 농업을 하며 부르는 농업 노동요가 있는가 하면, 바다에서 해물을 채취하며 부르는 어업 노동요도 있고, 산에서 일할 때 부르는 수산업 노동요도 있다. 제주지역에서 전해지는 민요가 있는가 하면, 강원도 산간, 충청도 내륙,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민요에는 각기 특성이 있다. 전라도 민요는 육자배기조(토리)로 되어 있고, 강원도, 경상도는 메나리조(토리)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아리랑만 하여도 지역별 아리랑이 모두 달라 정선아라리,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처럼 지역이름이 붙은 아리랑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처럼 민요는 다양한 특성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구비 전승되어 왔다.
지금 우리들은 민요를 잘 알고, 잘 전승하고 있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지역의 민요가 무엇인지, 우리 전통의 민요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명절에 겨우 방영되는 국악프로그램 정도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민요인지 판소리인지를 구분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될 지경이다. 현재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 등이 많은 레파토리를 가지고 전승이 되고 있지만 민요는 이미 실생활과 우리 삶에서는 멀어져 있다. 우리가 겨우 알고 있는 아리랑은 개화기 시절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니 그야말로 신민요인 셈이다.
하지만 트로트는 어떠한가. 요즘이 트로트의 전성시대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트로트는 이미 100여 년 이상 대중들에게 인기리에 불리어졌고, 노래방의 인기곡은 늘 트로트 장르였다. 남녀노소 흥에 오르면 트로트 한 곡쯤은 부를 줄 아는 것이 우리 시대의 문화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그러니 과거, 일이나 오락의 현장에서 함께 부르던 민요의 자리에 이제는 트로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트로트는 민요의 역할을 대신하고 또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그간 트로트가 걸어온 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19와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서민의 애환과 서글픔을 어루만지며 눈물의 공동체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민요적 성격을 보여준다.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노래, 우리 삶을 담아낸 공감과 위로의 노래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트로트는 애초 서양의 폭스트로트(fox-trot)라는 장르가 일본의 엔카로 변형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엔카풍의 노래들이 우리나라에 유행하면서 정착된 장르다. 트로트의 이러한 태생은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왜색이 짙은 트로트를 심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 ‘뽕짝’이라고 비하된 트로트는 구세대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최근 트로트 열풍으로 다시금 재평가되고 있다. 이름지어 ‘K-트로트’로 재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는 중국, 일본, 미국 등의 문화적 영향력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하지만 그 영향은 새로운 문화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우리 민족은 모방이 아닌 재창조를 위한 창의적 도전을 계속해왔다. 그러니 트로트 역시 한국적 노래로 만드는 데 더욱 노력해야 한다. 트로트에 민요나 국악을 기반으로 한 창법이 도입되고, 우리 삶의 정서를 노래하는 가사가 많아질수록 트로트는 한국 대중음악으로서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실험의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