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하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지만

2015-08-20     충청신문

연금은 국가가 운영하는 사회보장제도다. 연금은 고대 로마에서 시작됐지만 국민 모두를 위한 공적 연금은 옛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시작했다. 인디펜던트지 경제부장을 지낸 폴 월리스가 들려주는 비스마르크의 고백은 섬뜩하다. “늙거나 병들었을 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은 더 행복해 하고 더 유순해져서 다루기가 쉽다. …3억 마르크가 든다고 해도 가난하고 상속받은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면 과히 비싼 것도 아니다. 국가는 그들에게 요구하기도 하지만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꼭 이해시켜야 한다.”

▷복지가 아니라 정치였다는 얘기다. 비스마르크는 꼼수까지 부렸다. 연금 수령 나이를 평균 기대수명보다 훨씬 높은 70세로 규정해 국가가 많은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놓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노령연금 수령 나이도 70세였다.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이 일흔에 치사(致仕)했고, 고려 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치사표(致仕表)’란 명문장을 남겼다. 치사를 하면 봉록의 절반에 명예직인 노인직을 내렸고, 생일마다 치두미(致豆米)니 치주(致酒)라 해서 곡식과 술을 내렸으니 공무원 연금치고는 지금보다 훨씬 낫다 싶다.

▷물론 일반 백성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베이비부머 은퇴세대 100명 중 15명이 노령연금을 앞당겨 받고 있단다. 아무리 배를 곯아도 종자는 먹지 않는 법이라는데 당장 오늘 죽을 판인데 내일 걱정은 사치다. 노령연금 조기 수령자가 2009년 100명 중 9명꼴에서 올해 4월 100명 중 15명을 넘어섰단다. 불황 속에 노인을 먼저 배려하는 나라들과 달리 한국의 노인복지 재정 지출은 주요국들과 비교해도 가장 적은 편이다. 가족 간 유대를 중시하는 전통 가치관이 무너져 자식에게 기댈 수도 없는 상황이니 한국 노인의 삶은 고달프다.

▷1884년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이 땅을 밟은 호러스 알렌은 경로 효친의 전통에 ‘조선은 노인들의 천국’이라 감탄했다. 1973년 런던에서 아놀드 토인비를 만난 임덕규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은 세계적 석학이 한국의 효(孝)사상과 경로사상을 ‘온 인류의 으뜸가는 사상’이라 말했다 했다. 토인비가 부러워한 우리의 정신문화를 되살리자면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 노인이 가난한 나라에서 노인이 행복한 나라로 가는 길을 모두가 고민할 때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지만 소주 한 잔 들고 ‘구구팔팔이삼사’를 외치도록 하게끔은 해야 한다.안순택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