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으로] 곳간을 채우는 일
한기연 시인·평생교육강사
2019-09-02 충청신문
조선시대 이야기꾼 전기수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책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막힘없이 줄거리를 일목요연하게 말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러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창고 몇 개씩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덧붙인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니, 책을 읽어서 지식창고를 많이 채워놔야 글을 잘 쓸 수 있단다. 글을 쓰면서 매번 고민이 되었던 부분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 곳간은 텅 비었다.
곳간은 한자어 고간(庫間)에서 온 말이며, 고(庫)는 창고를 뜻한다고 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창씨(創氏)와 고씨(庫氏)가 대를 이어가며 곳집 지키는 일을 맡았다. 그래서 아예 물건 쌓아 두는 장소를 창씨와 고씨 성을 따서 창고(倉庫)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두 성씨가 창고지기 노릇을 변하지 않고 도맡아 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 한번 둔 채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창씨고씨(創氏庫氏)라고 하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오는 길에 심란한 마음으로 미뤄 뒀던 창고를 정리했다. 땀 흘리며 일하다보니 마음도 평온해졌다. 찾던 물건이 눈앞에 보인다. 그녀의 창고에는 잘 정리된 선반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꺼낼 수 있도록 품목별로 정리가 잘 된 책이 있다. 차고 넘치지만 지나치지 않도록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시켜 글로 풀어내는 재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여러 개의 창고를 가지고 있는 그녀야말로 부자가 아닌가?
서점에 들렀다. 돈을 지불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책으로 가져오지 못해 주인에게도 미안했다. 묵묵히 내면을 채워가는 그녀를 생각하면서 책을 고른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가치를 두고 곳간을 채워간다.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나름대로 가치를 담고 있다. 나는 마음 깊숙이 곳간을 새로 짓는다. 이제라도 책으로 채워 볼 요량이다. 변수가 많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창씨고씨(創氏庫氏)가 되어 줄 곳간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