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깊은 농부의 집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2021-08-31 충청신문
어느새 시간은 여름을 지나 가을의 경계에 서 있다. 늦여름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나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완연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서늘한 기온에 얇은 겉옷을 찾게 되고 맹위를 떨치던 한낮 불볕더위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해가 지고 난 뒤 한 집 두 집 여름내 열려있던 창문이 하나씩 닫히기 시작하는 걸 보면 예로부터 내려오는 절기(節氣)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여름 한낮 소나기 같은 시원시원한 성격의 집주인은 수년 전 서울에서 이사를 왔다. 처음엔 그저 복잡한 도시 생활에 지쳐 내려왔다며 몇 년만 살다 가리라 했는데 그 세월이 어느새 강산을 변화시킬 만큼의 시간이 되었단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막막하기만 했던 시골 생활에 적응하느라 우왕좌왕이었으나 마당에 심어놓은 사과나무 한그루가 해마다 열매 맺는 걸 보고 그 풍경이 좋아 아예 눌러앉았단다.
느지막이 집을 나와 제과점을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그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 대문에 들어서니 마당 가득 평상과 돗자리마다 빨간 햇고추가 하늘을 향해 빼곡히 누워 볕을 즐기고 있다. 그 색이 어찌나 붉던지 서산을 넘어가던 붉은 노을이 발걸음을 되돌려 돌아온 듯 눈이 부셨다. 엊그제 모두 땄다던 집 앞 고추밭은 또 그새 빨갛게 익어 어느 규수 댁 젊은 처자의 댕기를 모아놓은 듯 온통 붉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시골 친정집에도 이맘때면 고추를 말리느라 마당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한창 고추가 익기 시작하는 요맘때면 아버지는 엄마와 단둘이서 그 넓은 밭에 새벽부터 나가 익은 고추를 따고 해가 서산을 넘어 어둑어둑해서야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소일하고, 다음날은 일일이 수돗물에 씻기를 한나절, 그리고 고추 말리는 기계에 넣고 또 한나절을 기다리면 빛고운 건고추가 되어 나왔다. 그러면 또 마당 가득 멍석을 깔고 볕에 하루를 말려 방앗간에 가져가면 보드라운 고춧가루가 되어 일 년 내내 자식들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다. 서툰 글씨로 일일이 자식들의 집 주소를 적어 택배를 보내셨고 자식들은 부모님의 땀으로 탄생한 고운 고춧가루로 김장을 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맛볼 수 없게 된 고춧가루. 부모님은 이제 고추 농사를 짓지 않으신다.
마당에 앉아 평상 가득 널어놓은 붉은 고추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골집 친정에서의 기억에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대부분의 일에서 손을 놓아야 할 만치 기력이 쇠해진 부모님을 위해 이젠 해마다 이 집에서 고춧가루를 사 보내드린다. 하루를 이틀처럼 평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은 가을이면 늘 마당 가득 고추며 들깨, 참깨를 수확해 널어놓고 자식들 먹거리를 챙겼다. 부모님이 농부라서 얻게 된 혜택에 대한 감사가 지나 보니 셀 수도 없이 많다.
안주인은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준다. 그리고 좀 더 계절이 깊어지면 또 놀러 오라며 대문 너머 길 끝까지 배웅해 준다. 그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는 고마운 인연이다.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시집간 딸네로 이것저것 보내주는 재미로 산다는 이분, 문득 수필가 목성균 선생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나는 농부가 절대로 자신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