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왜 창가엔 항상 자리가 비어 있을까?
장일정 남서울대학교 2학년
2025-06-17 충청신문
마치 창가 자리는 벌칙인 것처럼 아무도 앉지 않으려 한다.
결국 늦게 버스를 타는 누군가는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거나 조심스럽게 통로 자리에 앉은 사람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언뜻 보면 별일 아니지만 매일 이런 상황을 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다들 창가를 피할까?’
물론, 통로 자리가 편한 점은 있다. 내릴 때 쉽게 나갈 수 있고 갑갑하지도 않다.
굳이 “저기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슬그머니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누군가 내 옆에 앉을 확률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일 수도 있다.
창가에 앉은 채 누군가 내 옆으로 와서 턱 하고 앉는 순간 버스 좌석은 숨 막히는 공간으로 변한다.
버스가 움직일 때 마다 조금씩 닿는 어깨, 팔이 흔들릴 때 마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상황이 썩 편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창가 주로 창가 자리에 앉는다. 창가 자리의 불편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통로 자리에 앉는 순간 그 불편함은 누군가에게 떠넘기게 되는 것이다.
좁은 틈을 억지로 들어오는 낯선 사람의 몸짓 그 좁은 틈을 만들려고 몸을 비트는 나 역시, 이 모든 상황이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감수하자는 마음으로 창가에 앉는다.
얼마 전엔 정말 신기한 상황을 봤다. 버스에 서로 아는 사이인듯한 아주머니 세 분이 탔는데 각자 따로 통로 자리에 앉았다. 아는 사이인데도 같이 앉지 않고 떨어져 앉는 그 상황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우린 친하지만 가까이 앉을 정도는 아니야!’라는 무언의 합의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곧, 이해했다. 가끔은 이런 풍경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낯선 사람들과 마주 앉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종종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 한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비대면에 익숙해진 것 같다. 우리는 점점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이해한다. 불필요한 불편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쉽게 불편함을 남에게 넘기고 있는 건 아닐까? 좁은 틈을 억지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 몸을 비틀며 비켜줘야 하는 나 또한, 그 모든 상황들이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불편이 되었다.
내가 창가에 앉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불편함을 내 몫으로 감수하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아주 작은 결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부드러운 아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타는 버스 안, 누가 어디에 앉느냐는 사소한 일 같지만 그 자리에는 어쩌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식과 편안함이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부러 창가에 앉는다.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솔선하고 있는데 그런 속마음을 누가 알까? 남의 불편이 나의 불편으로 받아 들이는 것부터 사회를 더 깊고 가까이 아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그것이 오늘 아침 나의 등굣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