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숫자 속의 ‘화려함’과 거리의 ‘고요함’-통계와 현실의 간극

김용민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 칼리지 교수

2025-10-19     충청신문
▲ 김용민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 칼리지 교수
대전 서구는 오랫동안 ‘대전의 중심’, ‘경제와 문화의 심장’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아왔다. 둔산동을 중심으로 금융기관과 관공서, 백화점과 공연장이 밀집되어 있고, 대전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서구로 가야 볼 것이 있다”고 말한다. 통계 수치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인구 규모, 경제활동 지수, 지역 내 총생산(GRDP)에서 서구는 늘 대전의 선두 자리를 지켜왔다. 겉으로 보기에 이 지역은 여전히 활력과 풍요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을 들어 거리로 나서면, 통계표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오후의 카페 창가에는 손주 사진을 들여다보는 노인이 앉아 있고, 공원 벤치에서는 하루 일과를 마친 듯한 어르신들이 묵묵히 햇볕을 쬐고 있다. 번화가 바로 뒤 골목에서는 문을 일찍 닫은 가게들이 늘어가고, 오래된 상가에는 ‘임대 문의’ 안내판이 붙은 지 오래다. 숫자 속 서구는 여전히 젊고 역동적이지만, 현실 속 서구는 천천히 노쇠해가고 있다. 이 간극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라, 앞으로 이 지역이 풀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서구의 인구 구조는 이미 경고음을 내고 있다. 서구는 중위 연령이 50세를 넘었고, 노령인구 비중은 20%를 바라보고 있다. 겉으로는 여전히 유동인구가 많아 보이지만, 그 흐름마저도 주말 쇼핑객과 공무원 출퇴근에 의존한 제한된 활성일 뿐이다. 통계는 여전히 “대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지역 초등학교 입학생 수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 유모차보다 보행보조차가 더 자주 보인다는 어느 주민의 말은, 숫자가 놓치고 있는 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통계 수치는 늘 평균을 말하고, 평균은 언제나 중심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평균이 아닌 개인들의 삶으로 구성된다. 의료기관 이용 횟수가 늘었다는 데이터는 있지만, “외출할 친구가 더 이상 없다”는 노인의 외로움은 한 줄도 기록되지 않는다. 경제활동 인구 감소율은 계산 가능하지만, 30년째 운영하던 동네 서점을 닫으며 “책 살 사람이 이젠 없다”던 주인의 체념은 표본조사 표에 남지 않는다. 그 사이, 서구는 ‘번영의 상징’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먼저 늙어가는 자화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구=활력’이라는 공식을 믿고 싶어 한다. 왜일까. 어쩌면 우리는 통계가 주는 안도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숫자는 정확해 보이고, 숫자는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숫자는 방향을 보여줄 수 있어도, 그 길 위의 감정과 고독, 체온은 담아내지 못한다. 지금 서구가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화려한 숫자를 믿는가, 아니면 골목의 고요를 보고 있는가?”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선이다. 서구는 다시 중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심은 더 이상 소비와 건물, 경제지표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정서, 고령자 복지, 공동체 안전망이라는 새로운 축이 필요하다. 노년의 삶이 고독이 아닌 존엄으로 채워지고, 골목길의 적막이 다시 교류의 소리로 바뀔 때, 비로소 서구는 진짜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런 질문으로 끝 맺음을 하고 싶다. 우리는 여전히 숫자 속 서구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서구가 조용히 보여주는 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금 서구의 풍경은, 단지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고령화 시대를 향해 가는 대한민국 전체의 거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