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으로] 쇼팽콩쿠르와 랑랑 이펙트
서필 목원대 교수·테너
2025-10-20 충청신문
대한민국에서 피아노를 배운다는 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거의 생존 훈련이다. 처음엔 남들이 다 보내니까 보내는 피아노 학원으로 시작하지만, 어느새 “콩쿠르 하나쯤은 해야지?”로 바뀐다. 아이는 건반을 두드리고, 부모는 통장을 두드린다.
요즘 클래식계엔 두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한다. 랑랑(Lang Lang), 그리고 오늘 시상이 열릴 쇼팽콩쿠르다. 전자는 스타 시스템의 상징, 후자는 세계 클래식계의 전장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현상이 요즘 아주 은근한 방식으로 맞물려 있다.
랑랑은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클래식계의 BTS다. 피아노 앞에서는 폭풍처럼 손가락을 휘두르고, 무대 아래에서는 브랜드 홍보와 SNS까지 섭렵한다. 그는 “클래식이 멋질 수 있다”라는 걸 몸소 증명했고, 실제로 수많은 중국 아이들이 그의 유튜브를 보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랑랑 이펙트(Lang Lang Effect)다. 덕분에 중국 내 피아노 학원은 붐이 일었고, 중국 부모들은 피아노를 ‘새로운 사교육 투자 종목’으로 떠올랐다. 오죽하면 그 시기엔 중국의 피아노 교육 열풍 덕분에 한국의 중고 피아노 매매 시장도 호황을 누렸다. 피아노가 교육열의 새로운 국경선이 됐다.
그리고 이번 2025년 쇼팽콩쿠르에서도 그 랑랑 이펙트의 여파는 확실히 느껴졌다. 본선 무대에 오른 참가자 명단엔 중국계와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가 역대급으로 많았다. 과거엔 ‘폴란드–러시아–한국’ 삼파전이던 무대가 이제 ‘중국’이 새 축으로 자리 잡았다. 랑랑이 뿌린 스타의 씨앗이 국제 콩쿠르라는 거대한 정원에서 꽃을 피운 셈이다. 물론 모두가 랑랑처럼 치는 건 아니지만, “중국에도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많았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클래식계의 구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
이런 흐름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랑랑은 클래식의 대중화를 꿈꿨지만, 그가 만든 열풍은 결국 또 다른 경쟁을 낳았다. 아이들은 쇼팽 대신 실내조명 아래에서 쇼츠용 영상 편집에 열을 올리고, 부모는 건반의 울림보다 팔로워 수에 집중한다. 음악이 감동을 잃고, 조회 수와 노출이 재능의 새로운 단위가 된 시대다.
한국은 여전히 조성진 신드롬의 그림자 속에 있다. 2015년,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하던 순간, 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피아노 학원은 폭발적으로 늘었고, 어린이들의 꿈은 축구선수에서 피아니스트로 갈아탔다. 조성진은 차분하고 절제된 연주로 ‘아시아 감성의 품격’을 보여줬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성공은 또 하나의 ‘압박 코드’를 남겼다. “다음 조성진은 누구냐?”라는 질문 말이다. 새로운 프런티어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따라붙을 제2의 OOO 찾기가 여전하다. 그렇게 한국의 음악교육은 오늘도 ‘다음’을 찾느라 현재의 음악을 듣지 못하고 있다.
랑랑은 대중화의 아이콘, 조성진은 완벽의 상징이다. 두 사람의 길은 달랐지만, 한국 사회는 그 둘을 통해 경쟁의 미학을 배웠다. 예술은 감동보다 순위로 평가되고, 연습은 즐거움보다 압박으로 진행된다. 콩쿠르 탈락자는 “음악이 전부는 아니다”라며 자신을 위로하지만, 마음 한편엔 “그래도 한 번 더 나가볼까”가 남는다. 이쯤 되면 음악이 아니라 중독 시스템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 달린다. 랑랑은 여전히 무대 위에서 손을 번쩍 들고, 조성진은 묵묵히 건반 위에서 숨을 고른다. 중국은 수천만 명의 피아노 학생을 키우며 문화 산업을 확장하고, 한국은 콩쿠르에 모든 열정을 쏟으며 자존심을 지킨다. 분명히 오늘이 지나면 쇼팽콩쿠르의 결선 결과를 놓고 교육체계와 방향에 논문 급의 기사가 쏟아질 게 뻔하다. 결선진출에 실패한 우리나라 참가자들에게 혹여나 '안타까운' 혹은 '아쉬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까 불안한건 그간의 기사들의 행태에 비추어 당연한 기우일지도 모른다. 세계무대에 당당히 오른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거늘, 피아노 하나로 세계가 이렇게 시끄럽다니, 쇼팽도 무덤에서 웃을 일이다.
랑랑의 웃음과 조성진의 침묵 사이에서, 한국의 음악교육은 오늘도 답을 찾지 못한 채 건반 위를 헤맨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 사회의 리듬일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조율된 불안, 그리고 끊임없는 박자 맞추기. 우린 어쩌면 음악을 사랑하는게 아니고 경쟁을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