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 주말여행] 밤의 별부터 호숫길 단풍까지, 충청의 가을을 걷다
바람이 한층 가벼워지고 햇살은 부드러워졌다. 낮에는 낙엽이 발끝에 쌓이고, 밤에는 불빛이 길 위를 덮는다. 도심의 수목원에서 시작해 강변 습지, 해안의 바다, 그리고 호숫길로 이어지는 길. 멀리 가지 않아도 충청의 가을은 충분히 가까이 있었다.
한빛탑을 배경으로 붉은 단풍을 담고, 새벽 안개 속 철새를 바라보며, 서해의 노을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으로 호수 위 단풍길을 천천히 걸었다. 축제가 끝나도 계절은 여전히 풍요롭다. 이번 주말, 빛과 잎, 물과 바람이 어우러진 그 길을 걸어보자.
대전 한밭수목원 단풍길
도심 속 공원이 이렇게 다채로울 줄 몰랐다. 한밭수목원에는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층층이 내려앉았다. 유리온실을 중심으로 이어진 데크길은 물가를 따라 완만히 흐른다. 연못 위로 비친 정자와 도시의 불빛이 한 장의 그림처럼 겹친다. 오후가 되면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고, 수목원의 색은 더욱 깊어진다.
아이 손을 잡은 가족, 카메라를 든 시민들이 발걸음을 맞추며 산책을 즐긴다. 온실 앞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도심의 시간조차 느리게 흘러간다. 저녁 무렵, 분수 조명이 켜지면 수목원은 또 다른 얼굴로 변한다. 유리온실을 비추는 불빛이 연못 위에 반사되고, 붉은 단풍과 도시의 불빛이 하나로 이어진다.
세종 합강습지 철새 관찰
금강과 미호강이 만나는 합강습지는 지금 철새들의 쉼터다. 해 질 무렵, 하늘이 붉게 번지면 수천 마리 새가 한꺼번에 비상한다. 군무처럼 이어지는 날개짓이 하늘에 거대한 그림을 남긴다. 전망데크에서는 망원렌즈 없이도 그 움직임을 충분히 볼 수 있다.
강 위에는 잔잔한 물결이 퍼지고, 갈대밭 사이로 노을빛이 스며든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잠시 모든 소리가 멎는 순간, 도심의 시간은 멀어진다. 그 고요함이 합강습지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른 아침에는 물안개가 피어올라 하늘과 강이 맞닿은 듯 흐릿하게 번진다. 낮에는 겨울을 준비하는 철새들의 무리가 머물고, 해 질 녘에는 붉은 하늘과 어우러져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충남 태안 안면도 가을 바다
가을의 안면도는 향과 빛이 공존한다. 해안을 따라 솔향이 스치고, 붉은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해변을 걷는 가족들의 그림자가 모래 위로 길게 늘어진다. 꽃지해변의 일몰은 계절의 마지막 장면을 품은 듯 붉게 번지고, 두 개의 할미·할아비 바위가 바다 위에서 서로를 향해 선다.
곰섬과 방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다. 서해의 공기는 짙고 맑다. 해 질 무렵, 바다 위로 남은 햇살이 번지면 하루는 천천히 접히고, 가을의 끝이 완성된다. 노을이 지고 난 뒤에도 해변에는 잔빛이 남는다.
모래 위를 걸을 때마다 파도 소리가 낮게 깔리고, 등대 불빛이 천천히 켜진다. 바다의 온도는 차갑지만, 그 풍경은 오래도록 따뜻하게 남는다.
충북 괴산 산막이옛길 단풍길
괴산의 산막이옛길은 호수 위의 길이다. 대청호를 따라 이어지는 데크길에서는 단풍과 물빛이 동시에 깊어진다. 초입에는 학과 거북 모양의 목조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그 너머로 잔잔한 호수가 펼쳐진다. 데크를 따라 걷다 보면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물결은 그 빛을 받아 잔잔히 흔들린다. 중간 전망대에 서면 호수와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후가 되면 햇살이 기울며 물빛이 황금색으로 변한다.
바람이 잦아들면 산새 소리와 사람의 발소리만 남는다. 단풍과 호수가 만나 만든 고요함, 그 평화로운 풍경이 가을의 마지막을 채운다. 때로는 산책로 옆 벤치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을 마주친다. 낙엽이 떠다니는 호수를 바라보는 그 뒷모습이 이 계절의 속도를 대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