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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과 바지랑대

"줄이 약해도 바지랑대로 지탱하듯 꿈과 이상으로써 지친 날들의 받침대로 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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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9.03 18:09
  • 기자명 By. 충청신문

고향집 마당에 빨랫줄이 있다. 헛간에서 외양간으로 이어진 줄에는 허구한 날 빨래가 펄럭였다. 그 밑에서 우리는 사방치기를 하고 땅따먹기를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까치발 드는 바지랑대가 있고 된볕에 틀어질 동안 까치발 들며 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다.

빨랫줄 하면 바지랑대가 떠오른다. 가을이면 바지랑대 끝에 잠자리가 있었다. 혼자 그 높은 데 앉아 있는 걸 보면 무섬도 타지 않는 참 대단한 녀석으로 생각했었다. 쪽빛 하늘은 물결처럼 차오르는 것 같고 그럴 때의 바지랑대는 물결을 저어가는 삿대다.

밤중에 비설거지를 할 때 더욱 그랬다. 가끔 빨래가 마르지 않아서 그냥 둔 채 자다가 후두두 소리에 놀라 가보면 바지랑대 혼자 칠흑 같은 어둠을 받치고 있다.

특별히 콩이야 팥이야 곶감을 잔뜩 널어둘 때는 채 덮고 자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면 죄다 철수시켰다. 그럴 때의 세상은 천연 밤바다였고 밤물결을 헤쳐 가는 바지랑대가 눈에 선하다.

바지랑대는 균형을 잡아준다. 빨래집게가 없어도 어지간하면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 끝이 V자 형인 가지 끝에 못을 박아 걸면 바람에도 무사했다. 바지랑대를 중심으로 널어야 쏠리지 않듯이 현실과 이상의 적절한 안배도 중요하다. 줄이 약해도 바지랑대로 지탱하듯 꿈과 이상으로써 지친 날들의 받침대로 삼는 거다.

빨랫줄을 보기가 힘들다. 더러 남아있다 해도 바지랑대는 보기 어렵다. 빨래를 하면 우선 건조대부터 꺼내는데 접어둔 것을 뜰에 펴서 널다 보면 옹색한 게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개켜 두기는 편해도 비가 오면 빨랫줄처럼 흔한 이슬방울 맺히는 것도 볼 수가 없다.

우리도 2층에 빨랫줄은 있고 이불과 홑청을 널 때만 올라가는데 성가시다고 건조대를 쓰면서도 아쉬운 건 있다. 빨랫줄의 백미는 거미줄이 매달린 모습이다.

더더욱 금상첨화라면 구슬비가 조발조발 꿰어질 때다. 거미줄은 대략 초여름에 짓는데 비가 잔뜩 내린 후 올라가 보면 줄 하나 가득 이슬이 맺혔다.

봄비가 내릴 때는 물방울 영롱한 진주 목걸이가 되었고 널기도 민망할 때가 있다. 희귀한 목걸이를 달고 뽐내던 기색은 금방 사라지고 나일론 끈을 얽어맨 줄로 바뀌기 때문이다. 가끔 오가는 거미도 보면 외줄 타는 광대보다 날렵하다.

먹이가 걸려들면 어디선가 나타나 지금처럼 곡예를 벌일 테지. 가을이면 잠자리가 맴돌며 착륙하는데 천연 비행기의 활주로다. 맨드라미가 닭 벼슬 같은 꽃잎을 내밀고 봉숭아꽃이 피는 것도 근방이다. 땅에 끌릴 것 같다가도 바지랑대를 올리자마자 탄력이 붙었다. 늘어진 줄은 함지 가득 빨래를 널던 고단한 어머니를 빼닮았다.

사흘돌이로 홑청을 뜯어 풀다듬이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이다. 열흘 보름 간격으로 두루마기며 고쟁이를 손질하느라 오죽 고단했으랴. 못된 시어머니도 그 날은 밥 많이 먹으라 했다니 빨랫줄 역시 늘어지고 끊어져 툭하면 갈아맸어도 요즈음의 세탁기는 마땅치 않으니 웬일일까.

허구한 날 덮는 침구와 의류조차 볕을 쬐는 시간이 짧은데 신형 드럼 세탁기는 금방 개켜도 될 만치 말려서 나온다니 편한지는 몰라도 위생적인 면에서는 별로다.

고장이 나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면서 빨랫줄 생각에 괜한 투정이 나온 셈이다. 세탁기 문화가 발달하고 빨랫줄이 식상해지면서 건조대를 쓰는 것인데 비가 와도 물방울 하나 맺히지 않고 여름이 가도록 거미가 집 한 번 짓지 않는다.

세월이 가도 늘어지지 않는 것도 무슨 무슨 주사를 맞고 주름살 하나 없이 다니는 아줌마들 같다. 어느 날 부품이 삭아 무너지는 것보다 바지랑대 힘으로 팽팽 탄력이 붙는 게 좋다. 나도 빨랫줄 세대였을까. 지금은 9월 초, 물방울 진주 촉촉한 거미줄도 볼 수 있겠다.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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