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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친근한 죽음’ 위해 죽음의 장소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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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5.14 17:35
  • 기자명 By. 정완영 기자
▲ 정 완 영 편집국 사회부장
5년 전 추석 명절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한 어르신을 떠올린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이나 요양원 등 전혀 낯선 곳에서 임종을 맞는 것과는 다르게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비록 집안 식구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살던 집, 자신이 쓰던 방에서 조용히 혼자 임종을 했다. 돌아가신 분의 얼굴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그리 오랜 시간 병치레를 한 것이 아니고 또 그 어르신이 앓았던 병이 치매나 중풍이 아니어서 가능했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도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어르신의 임종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더 오래 전의 임종을 맞이하는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의 임종 방식과 달랐던 때문일까
 
장례를 모시고 난 후 남은 가족들 중의 일부는 어르신을 병원에 모시지 않고 방치했다는 불만 섞인 푸념들도 늘어놓았다. 지금의 생각대로 한다면 방치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오히려 돌아가신 분은 낯설지 않은 환경에서 두렵지도 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우리나라에서 죽음은 삶과 함께 공존했다. 그 방에서 태어나 밥을 먹으며 자라서 같은 자리에서 죽고, 장례도 치렀다. 이런 일들은 누대로 반복되어 왔고 곧 하나의 생활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내가 또 나의 아들, 손자가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이었다.
 
한 때는 집 밖에서 죽음을 맞으면 ‘객사했다’고 말하면서 집 안에서 장례를 모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오로지 집안에서 임종하고, 집안에서 장례를 모시는 것이 당연시 되던 때가 있었다.
 
장례를 치를 때도 안방의 아랫목에 망자를 칠성판 위에 모셔놓고 병풍으로 가린 후 조문을 받았다. 집안 마당이나 방에서 손님을 받기가 어려우면 동네 고샅에도 화톳불을 피우고 차일을 치고 조문객을 대접했다. 동네 골목을 막은 조문객들 때문에 조금의 불편을 겪는 이웃 주민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도 했다. ‘상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을 충족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어느 때 부터인가 우리의 임종문화는 급속한 변화를 맞았다. 주거의 환경이 주택에서 공동주택 형태로 바뀌어 엘리베이터를 많이 이용하게 되고 주변의 이목을 살피지 않으면 되는 편리함을 앞세워 병원이나 요양원 내지는 요양병원에서 임종하게 하고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시 됐다.
 
임종에 관해서 중세유럽에서는 함께 사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방에 누워 있는 망자의 곁을 지켰고 삶에 있어서 마지막 숨을 들이키는 그 순간까지 가족과 친척, 친구와 이웃,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망자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임종의 대부분은 자택이 아닌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임종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제한적이 됐고 어린 아이의 경우 아예 격리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유희수의 <사제와 광대>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19세기 초까지 전통 사회에서 가족과 이웃과 친지들이 지켜보며 보살피는 가운데 맞이하는 죽음을 “친근한 죽음la mort apprivoisee”이라고 불렀다. 요컨대 현대 사회에서는 노령과 죽음 같은 타나토스가 억압되는 대신 젊음, 건강,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적인 에로스가 죽음을 감추려는 “금지된 죽음la mort interdite”의 양식을 낳았다. 
 
얼마 전 연세가 드셔서 죽음을 맞이하실 분들을 대상으로 받은 설문 조사 통계를 한 기관에서 내놓은 것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문에 응답한 사람의 57%가 자신이 살던 집에서 기거하던 방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응답을 했다는 것이다. 낯선 병실에서 낯선 의료진의 얼굴을 보면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죽음을 앞두고는 많은 사람들은 편리하지도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옛날 방식의 죽음 자리를 선호한 것은 마음 한 켠에 참 인간적이고 편안한 죽음 즉 친근한 죽음을 갈망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죽음의 장소가 정해지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낯선 죽음을 맞이한다. 그 처음 맞는 낯선 죽음에서 눈에 익은 사람들과 눈에 익은 풍경을 보며 눈에 익은 장소에서 친근한 죽음을 맞는다면 망자에게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정 완 영 편집국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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