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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귀뚜라미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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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03 18:53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안 순 택 편집국장

비가 지나간 대기가 모처럼 말끔하다. 똑같은 풍경인데도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이다. 그것이 바로 아직은 어제나 다름없는 세상에서 느끼는 가을의 첫 기운이다. 가을이 온다. 어떻게 오나.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오고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온단다.

가을의 길목에서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걸 보고 귀뚜라미가 사연을 물었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웃다가 입이 찢어졌네. 그런데 자네, 그 톱은 뭣에 쓰려고 가져가는가?”

“추야장(秋夜長) 독수공방에 임 기다리는 처자 낭군 애(창자) 끊으러 가져간다.” 남도(南道)의 우화성 민요다.

왜 ‘귀뚜라미=가을’일까. 이맘때 들리는 소리가 귀뚜라미 소리요, 쓸쓸함, 외로움, 고향을 향한 향수 같은 게 가을엔 더 깊어지기 때문일 거다. 옛 선비들은 타향에 벼슬살이 갈 때 고향의 귀뚜라미를 풀 섶에 담아들고 가서 창가에 올려놓고 고향의 소리를 듣고 있다. 관북의 귀뚜라미 소리 다르고 호서의 귀뚜라미 소리 다르다 했으니 대단한 청감(聽感)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 가을의 정서, 가을밤을 깊게 만드는 건 기우는 달이 아니라 귀뚜라미의 세레나데였던 것이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서 가을을 느끼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귀뚜라미 우는 소리로 주변의 온도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미국의 과학자 아모스 돌베어가 연구를 해 1897년 ‘아메리카 내처럴리스트’란 학술지에 ‘온도계 구실을 하는 귀뚜라미’라는 논문을 내놓고 있다. 이른바 ‘돌베어의 법칙’인데, 귀뚜라미, 그 중에서도 긴꼬리귀뚜라미가 14초 동안 우는 횟수를 세고 그 횟수에 40을 더하면 화씨온도가 된다는 거다. 예를 들어 긴꼬리귀뚜라미가 14초 동안 35회 울었다면 화씨온도가 75도이고 이걸 섭씨로 환산하면 24도 정도가 된다.

귀뚜라미는 대개 양쪽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내는데 변온동물인지라 온도가 높아질수록 신진대사가 빨라져 소리의 빈도가 높아지고 온도가 떨어지면 템포도 떨어지게 된다. 귀뚜라미는 섭씨 24도 안팎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고, 때문에 늦더위가 남아있는 이맘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고 한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서 가을을 느끼는 건 과학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귀뚜라미는 한문으로 ‘촉직(促織)’이라 쓴다. 날이 추워지니 어서 베를 짜라고 재촉하는 소리라는 거다. 그렇다. 가을은 마무리의 계절이요, 정리의 계절이며 결실의 계절이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들리는 때.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문득 이번 가을엔 귀뚜라미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좀 외로워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혹은 삶의 등짐을, 혹은 마음 한구석의 짐을 덜어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얼마 전 책상을 치우면서 쓸데없는 것이 너무 많은 것에 새삼 놀랐다. 들춰보지도 않은 책 무더기들, 쌓아놓은 자료뭉치들, 뜯어보지도 않은 우편물들…. 서랍에 잔뜩 쌓인 잡동사니를 버리면서 없어도 될 것에 너무 집착해 왔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우다보니 친한 벗의 편지가 보내준 그대로 겉봉이 누렇게 변해있어 아차 했다. 쓸데없는 걸 태산처럼 모으느라 정작 간직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세상이 시끄럽고 세상살이가 온통 힘들고 어지럽다 해도 올 가을엔 삶의 짐도 덜고, 마음의 짐도 덜어내면서 좀 외로워졌으면 좋겠다. 바깥으로 열린 문을 닫으면 내면의 뜰이 넓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 가을 우리 모두 조금씩은 여유롭고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안 순 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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