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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59>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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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1.24 17:06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글/ 남균우

 
4부. 정묘호란
 
 
후금군이 용골산성 절제사가 죽자, 이 여세를 몰아 성을 공격하자 성 안의 민심이 다시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중군 이충걸이 도망가고 협수장 장사준도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용골산성은 지휘체계가 마비되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 안에 남아 있던 조선 군민들은 후금군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의병이 되어 성 안에 피신해 있던 전 영산현감을 지낸 철산 사람 정봉수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정봉수는 관군 잔여 병력과 성내의 주민들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대오를 정비하니 그 수가 수백 명이었다. 이때부터 방어체계가 바뀌어 관군 주체 방어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의병부대가 이를 방어하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를 당상관(정3품)으로 승진시키고 가산군수에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군세가 더욱 강성해지자 정봉수는 군사를 이끌고 용골산성으로 들어가 웅거하였다.
 
평안감사 김기종은 용골산성 의병장 전 영산현감 정봉수가 의병장에 추대된 것과 성내 인원이 4000명이라는 상황 등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용골산성 의병장인 전 영산현감(靈山縣監) 정봉수(鄭鳳壽)의 치보에 ‘저는 본래 철산(鐵山) 사람인데, 적의 침략을 받아 살아날 길이 없다고 일찍이 본성(本城)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어왔던 터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용천·의주·철산 등 읍에 피난하는 사람들이 돌아갈 곳을 모르다가 모두 성 안으로 들어와 재촉하여 장수를 시켜주었습니다. 드디어 사방에서 병사를 모집하니 며칠 내에 병정이 단합하여 4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출신 김종민(金宗敏)을 중군으로 삼고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이광립(李光立) 등과 한 마음으로 계획하여 정예병을 뽑아 적들의 정세를 보아가며 출전하려 합니다’ 하였습니다.”
 
의병장 정봉수는 성의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후금군은 용골산성의 방어작전을 지휘했던 부사가 전사하고 중군이 도망가고 협수장이 항복한 상황이 전개되자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깔보고 1000명의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성 안의 남녀가 침공한 적군을 향해 사력을 다해 물리쳤고 막대한 피해까지 입혔으며 성 밖 10리 지점으로 후퇴시켰다.
 
어느 날 적의 장수 3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산성 후면으로 올라가는 것을 감지한 정봉수는 정예 포병 30여 명을 수풀 사이에 매복시켜 놓고 엄명을 내렸다. “후금군의 병졸은 보지 말고 그들 장수가 접근하거든 각기 10발씩만 쏘아라.” 얼마 후 적장 3명이 바위 위에 말을 세우고 그들 군사들에게 성을 격파하라고 독전을 하고 있었다. 이때 매복하고 있던 포병이 일시에 포격을 퍼부어 그들 세 장수를 사살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적은 크게 무너졌다.
 
이렇게 방어태세가 강하자 항복한 장사준을 내세워 항복을 권유했다. 즉 1월 16일 장사준은 후금의 향도가 되어 성 주변에 700여 영의 후금군을 매복시켜 놓고 10기의 호위병과 함께 성 밑으로 다가와 위협조의 항복을 권유하였다.
 
 “너희가 만일 항복을 하지 않으면 비단 군사들에게 화가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미치는 화도 헤아릴 수 없이 클 것이다.”
 
이때 성 밖에 매복하고 있던 조선 군민들이 장사준과 수행자 10여 명을 급습하여 이들 모두를 죽였다. 이렇게 되자 주변의 후금군의 병사들이 성을 향애 돌격해 오자, 성안의 의병들도 성 밖으로 달려 나가 후금군의 기병 병력과 혼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후금의 기병은 거의 사살되었고, 말을 빼앗기고, 본진으로 후퇴하여 3월 3일까지 조선과 후금과의 화의가 성립될 때까지 약 2개월 동안 서로 공격을 못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후에도 용골산성의 의병부대가 해산을 거부하자 후금군 대장 아민은 3월 27일 의주, 곽산 일대의 후금군을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묘시(오전 5시~7시)에서 신시(오후 3시~5시)까지 다섯 차례나 거듭되었다. 성벽 위에서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전 주민이 동원되어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후금군에 대하여 시석과 총포 사격으로 사격을 퍼붓는가 하면 일부 날쌘 장정들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후금군과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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