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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편지가 생각나는 계절,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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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10.13 13:45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민승림 칼럼니스트

[충청신문=민승림 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대전 역사박물관에서 아주 오래된 한글 편지를 보았다.

어느 종가(宗家)의 묘 이장 과정에서 발견 되었다는 이 편지는, 1498년경에 쓰여 진 것으로,군관으로 함경도에 가 있는 남편이 고향의 아내에게 보낸 것이다.

두 겹으로 고이 접힌채 발견된 편지에는 이번 휴가에 가지 못하게 된 사연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미안함, 그리고 아내의 선물로 바늘과 분첩을 사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500년 전 부부의 애틋한 정이 담긴 이 편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이다.

오래되어 누렇게 된 종이는 그리움이 느껴지는 내용 뿐 아니라, 당시 남편의 마음까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아내는 얼마나 이 편지가 소중했으면 무덤까지 넣어갔을까...

멀리 떨어져, 보고 싶은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간 편지에는, 쓰는 사람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만약 이 부부처럼 몇 달이 아니라, 십 년이 넘도록 가족과 떨어져 있게 된다면, 그 그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천주교와 관련되어,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가족에게 쓴 편지는 책으로 엮어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편지들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수 많은 책을 지은 학자가 아닌, 먼 곳에 유배되어 아비와 남편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 남자로서의 솔직한 고백이다.

더구나 이 편지는 종이가 아니라, 그의 아내가 보낸 낡은 치마를 잘라서 쓴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하피첩(霞帔帖)인데, ‘하피’는 ‘노을 빛깔의 붉은색 치마’란 뜻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 여인의 예복을 가리킨다.

당시 쓰여 진 정약용의 글에는 '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쳐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색 활옷이었다. 붉은 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없어져 글씨를 쓰기에 맞춤이었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대로 경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냈다. 바라기는,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 것이고, 두 어버이의 아름다운 은택이 느꺼워 뭉클한 느낌이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초로의 병든 아내는 무슨 마음으로 낡은 치마를 멀리 귀양 가있는 남편에게 보냈으며, 그 치마를 잘라 편지집을 만드는 다산의 마음과 머릿속은 어떠했을까….

다산처럼 유배를 가는 경우 말고도, 앞의 한글 편지에 쓰인 것처럼, 조선시대 관리들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근무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고향에 남겨진 아내는 멀리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다.

아내가 보낸 낡은 치마를 잘라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니, “역시 다산답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유배지의 힘든 상황에서도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진다.

다산은 아들에게 보내는 글을 쓰고 남은 치마 한 폭을 잘라, 시집을 가게 된 딸에게 그림을 그려 보냈다. 이것이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산의 매조도(梅鳥圖)이다.

매화가지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이 그림은 작은 가리개로 쓰라고 만든 것으로 아래에 적힌 시(詩)에는 ‘너와 함께 지낼 수 없어 미안 하구나’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 그림을 받아 든 딸은 멀리 있는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을 떨구었을 것이다.

때론 장황하게 쓰여 진 글보다 한 점의 그림이 커다란 울림을 주는 경우가 있다.

비록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곁에서 챙겨주지 못하는 자식을 위해 그린, 매화와 새 두 마리의 의미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 온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입었던 낡은 치마와 그것을 잘라 그림을 그려 보낸 아비의 마음, 이 그림이 아름다운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하피첩’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담겨 있다. 다산이 유배 중일 때, 천연두로 죽은 막내아이를 위해 지은 글로, 아이의 형에게 보내 무덤에서 읽어주게 하였다고 한다.

다산은 그 후 천연두를 치료하는 방법을 정리한 ‘마과회통’을 지어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이 밖에도 세계사나 미술사 중에는 유명한 편지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수 백 통의 편지에는,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과 삶이 담겨 있어 그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네루(Jawaharlal Nehru,1889~1964)의 ‘세계사 편력’은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며 초대 총리를 지낸 그가 옥중에서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낸 편지글을 모아 만든 책이다.

2003년 개봉 된 손예진과 조승우가 주연한 영화 ‘클래식’은, 딸이 엄마의 오래된 편지를 꺼내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여러 장을 버려가며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 보내고, 커다란 가방을 맨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요즘은 거리에서 빨간 우체통을 찾아보기 어려워 졌다.

대부분 간편한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고받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편지가 아니라 e메일이나 휴대폰 메시지로 안부를 전하며,먼 곳에 있는 사람과 목소리는 물론 화상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가 가능한 세상이다.

습관적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울리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 글을 보내지만,손으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가 주는 애틋함이나 간절한 마음은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뭔가 아쉽고 허전하기 때문에, 더욱 문자를 보내고 받는 것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삶의 질까지 향상시켰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는것 중 하나가 이 휴대폰이다.

가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나 가족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오랜만에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써 보거나, 아니면 전화라도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

나도 어딘가에 보관해 두었던 편지들을 꺼내 읽어 보아야겠다.

오래 된 종이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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