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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빗줄기로 보는 겨울밤 삽화

이정희 시인.둥그레동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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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12.27 15:4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동인회장
[충청신문=이정희 시인.둥그레동인회장] 신호등 불빛이 섬광처럼 반짝인다. 초록색 신호등은 푸르다 못해 써늘한 군청색이다. 붉은 빛은 현란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고, 뒤미처 깜박이는 노란 색 또한 강렬한 주홍빛이다.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 뜻밖에 펼쳐지는 빛의 스펙트럼. 불빛도 불빛이지만 한길에 비친 물줄기도 드물게 산뜻하다. 푸른빛 기둥과 붉고 노란 물기둥이 연거푸 뻗어간다. 특별히 차량이 지나가면서 길 한복판에 드리워진 빛깔의 띠가 춤추듯 흩날릴 때는 꿈속에 그리던 오로라의 모습과 흡사했다.
 
돌연 거대한 빛깔의 띠가 번뜩이면서 길 잃은 영혼처럼 떠도는 오로라. 경관이 좋은 곳도 아니고 철적게 겨울비 내리는 밤 소도시 외곽에서 보는, 그나마도 붉고 푸르고 노란 신호등 빛깔에서 오로라를 연상하는 게 좀 그렇지만 겨울밤에 연출되는 빛의 향연이라 더욱 강렬했다는 느낌. 극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만큼 가당치 않은 상상이었으나 아울러 살면서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해 왔지만 최근 겨울이 따스해지면서 눈 대신 비가 자주 오고 그로써 펼쳐진 비경이다. 늘 다니는 길의 같은 지점에서 보는 빛깔의 차이는 춥고 썰렁한 계절의 배경 효과 때문이었을까.
 
비경은 또 있었으니, 수많은 차량의 점멸등이 물에 비칠 때마다 눈부시게 흰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신호등 불빛이 찬란한 빛깔의 집합이라면 이것은 극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은회색 얼음판이다. 오로라야말로 그 새하얀 얼음바다에서 펼쳐진다는 게 더 설렌다고 할까. 비록 커 봤자 얼음기둥 정도밖에 안되지만 그로써 펼쳐 본 상상의 나래는 소중했다. 북극 남극까지는 아니어도 스웨덴과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볼 수 있으되 남, 북위 등의 극점에 가까울수록 훨씬 아름답게 펼쳐진다는 것 때문이다.
 
아무려나 극지방의 오로라에 비할까마는 기록에 따르면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관측되었다니 놀랍다. 백제 시대의 "여름 4월 동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는 거나 "봄 3월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원에 뻗쳤는데, 마치 뱀과 같았다."고 하는 고구려 때의 기록도 있다. 혹은 "밤에 비단같은 백기가 하늘까지 닿았다가 갑자기 붉은 기氣로 뻗어나갔다."는 고려시대의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계속 이어졌다는 뜻. 일설에는 그렇게 '붉은 기운'이 10년 주기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는 곧 10년 주기로 강해지는 태양의 기운을 나타내는 바, 그럴 때마다 더 자주 띄던 '붉은 기운'이 오로라였다고 표현한 것은 크게 무리가 없다.
 
기록에 의한 것인 만큼 전적으로 믿기지는 않으나 최근 들어 무지개를 자주 볼 수 없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어릴 적, 비가 그쳤다 하면 뜨던 무지개. 토란잎과 떡갈나무 이파리에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을 때는 비가 어지간히 왔다는 뜻이고 그럴 때의 무지개는 훨씬 산뜻하고 선명했다. 비는 그쳤지만 공중에 남아 있는 물방울에 햇빛이 반사되면서 나타난 걸 모르고 환상에 사로잡히던 기억.
 
마루 끝에 앉아 혹은 느티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허공에 걸쳐진 그것을 보면 무척 설레고 두근거렸건만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혹시 나는 모르고 지나쳤을지언정 누군가는 보기도 했겠지만 비가 그치면서 떠오르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 옛날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 자주 볼 수 있었던 오로라 역시 무지개의 경우처럼 어떤 현상으로 인해 볼 수 없이 된 것 아니었을까.
 
하기야 무지개뿐이 아니다. 밤중에 나가면 눈동자마냥 반짝이던 수많은 별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거야 대기 오염으로 인해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뿐이고 더불어 기록 이전에 오로라를 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나 기록대로라면 옛날과는 달리 오로라를 보는 게 힘들어졌다는 뜻인데 이따금 태양의 활동이 활발한 시기에는 비슷한 현상이 관측된다고도 하니 세월이 바뀌면 예전처럼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혹시 어릴 때 본 무지개가 다시 뜨게 된다면 그런 날도 올 것 같기는 한데 심각한 대기 오염을 보면 확신은 서지 않는다. 과학이나 문명이 편리하기는 해도 그 발달과 진보는 자연도 그만치 훼손되었다는 뜻을 나타냈으니, 비경은 더불어 사라질 수밖에.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알래스카니 아이슬랜드 역시 오염되다 보면 우리 기억의 무지개처럼 한낱 옛 이야기로만 추억하게 될까 두렵다. 정녕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비가 그쳤다 하면 떠오르던 무지개가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상황도 심상치는 않았으니까.
 
한밤중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계절에 상관없이 비가 오고 신호를 기다리며 간단없이 바뀌는 빛깔을 보는데 유달리 강렬한 느낌에 글 한편을 다듬고 있으니 묘하다. 오늘은 어쩐지 추억의 밤이 될 것 같은 기분. 오로라는 가당치 않고 단지 신호등 불빛에 따른 상상이었으나 한겨울, 북극의 밤을 그리며 때 아닌 동화의 나라에 온 듯 환상적이다. 파묻히도록 쌓인 눈과 순록의 썰매. 북쪽일수록 우리 보기 힘든 오로라가 뜨는 것보다 더한 소망이 있을까. 겨울은 늘 추운 만큼 따스했었지. 썰렁한 날에도 봄을 생각하면 훨씬 정겹고 따스했다. 추위는 이제금 시작되었고 봄은 아직 멀었지만 멀게만 느껴질수록 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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