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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저항한 3·1 대한광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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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0.03.02 19:01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기자
대한국(大韓國)은 고조(高祖) 광무제가 한반도 간도 녹둔도 제주도 대마도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 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고조(高祖)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북악산)과 목멱(남산) 사이의 경운궁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해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해 조선시대에 이어 대한시대가 시작됐다.

1904년 2월 23일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늑결해 1900년 10월 고조 광무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22일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국 독점지배에 관한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했다.

1905년 11월 17일 늑결된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자 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1907년 7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한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네덜란드에 특사(特使)로 파견했고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다. 일제가 강제한 을사늑약을 폭로하려 했던 고조 광무제의 계획은 대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대한국 대표들이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 이위종 특사의 ‘대한국을 위해 호소한다’는 연설은 세계 언론에 보도됐다. 일제 통감부는 대한병탄을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7월 20일 고조 광무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 황실 황위 승계 서열 1위 의친왕 대신 어린 영친왕을 황태자 책봉해 영친왕비 민갑완(閔甲完)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7월 24일 군대 해산, 사법권·경찰권의 위임, 법령권 제정·관리임명권 간섭하는 정미늑약(丁未勒約)을 강제했다.

일제 통감부는 1909년 9월 4일 간도의 이권을 위해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가 비준하지 않아 무효인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해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했고 안중근(安重根)은 10월 26일 북간도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통감에게 권총을 쏘아, 3발을 명중시킨 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됐으며 대한국(大韓國)은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일제에 불법 병탄(倂呑)당했다.

고조 광무제는 1919년 1월 21일 일제 총독부의 독살에 의해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2·8 대한광복선언, 경운궁 대안문·고조어극40년칭경기념비전·보신각·원각사지 앞 3·1 대한광복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이 됐고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강제로 퇴위된 고조 광무제는 대한인국민회, 대한독립의군부, 대한광복군정부 등 대한광복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었으므로 신한혁명단, 대동단이 고조 광무제, 의친왕을 망명시키려 했고, 고조 광무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대한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최팔용이 대한기독교청년회관의 재일 대한국 유학생 600여 명 앞에서 ‘대한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기초했으며 백관수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의 도화선이 됐는데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돼 유학생들을 지도해 대한 병탄이 한민족의 의사와 반하는 것이므로 대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한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며 한민족의 대한광복운동을 촉구했다.

대한광복운동 지도자 39명은 길림에서 무오 대한광복선언을 통해 대한국의 광복을 주장하고, 일제 총독부의 독살에 의한 고조 광무제 붕어(崩御)로 인해 촉발된 재일 유학생의 2·8 대한광복선언의 영향을 받은 3·1 대한광복운동은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으며 일제의 불법적인 대한국 병탄(倂呑)과 총독통치에 저항해 한민족의 대한광복 의지를 천명하는 평화적인 대한광복운동이었으나 일제 총독부는 서울, 화성, 천안, 대구, 합천, 마산, 익산, 남원의 대한광복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김민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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