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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버지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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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9.30 15:45
  • 기자명 By. 충청신문
박종용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박종용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인가? 무엇이 더 바람직하고 수월한가? 이런 걸 고민하지 않고 아버지의 방식 그대로를 지켜 드리고 싶었던 시간이 있다.

9월 24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추석 명절을 보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가족들은 생전에 부모님이 사셨던 논산에 모였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에 하던 방식 그대로 차례상도 준비했다. 성묘하러 선산에도 다녀왔지만 허전했다. 

생전에 아버님은, 자식들이 성묘하기 편하게 하신다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상의 뫼를 한 곳으로 모았다. 비석부터 둘레석까지 석물도 다 갖추어 놓으셨다. 내 아버지께서 조상님을 그리고 자식을 사랑한 방식이다. 근데 정작 아버님과 어머님을 합장한 뫼에는 아직 그러하지 못했다. 죄송스러웠다.

이제 두 분 모두 고향집에 계시지 않는다. 얼마 전, 지난 해 9월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제사(忌祭祀)를 지냈다. 82세였다. 올해 3월에 운명하신 아버님의 생신제(生辰祭)도 모셨다. 83세였다. 두 분 모두 암으로 투병하셨다. 게다가 어머님은 대상포진에 걸려 이중고를 겪으셨다. 

5남매와 배우자 그리고 손주·손녀들은, 부모님께서 치료받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역할을 분담하여 간병하였다. 바쁜 시간을 쪼갠 가족들에게 언제나 고마운 마음이다. 그래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이렇게 저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후회막급(後悔莫及)이지만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머님은, 서울에서 임시 숙소를 얻어, 항암 주사를 30회 맞으셨다. 식도암이라 제대로 음식 섭취도 못했기에 하루하루 야위어 갔다. 항암 치료 후에는 급격하게 피로감을 느끼셨다. 논산에서 서울 병원을 한 번 가려면, 승용차와 기차 그리고 택시로 갈아타느라 너댓 시간이 걸렸다. 여러 가지 검사와 진료를 받고 다시 논산에 가시면 늦은 밤이 되곤 했다. 대전에서 잠시 머물다가도 이내 고향이 좋다며 데려다 달라고 하셨다. 

작년 3월부터는 새로 구입한 승용차로 모셨더니 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병원을 오가는 동안에 누워 계실 수 있어 더욱더 좋아하셨다. “나는 아들 덕분에 편하다만, 네가 힘들어서 어떡하냐?”라며 자식 걱정을 하셨다. 그때마다 “엄마 모시고 서울 여행 다니니까 너무 좋은 걸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어머님이 한사코 싫다 하셔도 맛있어 보이는 먹을거리를 사드렸다. 무엇이 입맛에 맞으실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운구(運柩)도 가족이 했다. 상주나 고인의 친구가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에 우리 손으로 모시고 싶었다. 운구를 위해 장지에서 대기했던 충남고 출신 후배 교사들에겐 무척 미안했다. 마을 어르신 40여 명은 음식 봉사부터 봉문(封墳) 만드는 것까지 도맡아 주셨다. 게다가 아버님께서는 살아생전에 당신이 묻힐 가묘(假墓)를 선영(先塋) 아래에 미리 만들어 놓으셨다. 

어머님 장례를 마친 후 5남매가 한자리에 모여, 삼우제(三虞祭)를 비롯하여 탈상(脫喪)까지 후속 절차에 대해 협의하였다. 5남매 가족 중에는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가 있다. 어머님은 불교 신자이셨다. 가족들은 불교 의식인 49재(四十九齋)로 의견을 모았다. 아버님께서는, 어머니의 위패를, 절이 아닌 집에 모셨으면 좋겠다고 의향을 밝히셨다. 농사일을 하며 부모님을 모시던 남동생에게, 또 49일간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라는 것이, 면목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남동생은 아버님의 뜻을 따라주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님과 같은 절차를 따랐다. 내가 아버님의 영정사진과 위패를 대전으로 모시고 왔다. 아내가 직장에 다니다 보니, 49일 동안 꼬박꼬박 아침저녁으로 밥과 국을 새로 준비해 올리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가족여행 때에는 아버님의 위패를 모시고 갔다. 숙소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췄다. 5남매는, 7일째 되는 날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우리 집으로 모였다. 49재를 지낸 그 날까지 7번을 그렇게 한 후 탈상했다.

하루는, 함께 사는 네 살배기 외손자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버님의 영정사진이 있는 제사상으로 달려가더니, “논산 할아버지에게 절해야지요”라며 꾸벅 엎드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기특하던지, 나는 외손자를 꼭 껴안아 주었다. 어른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의 사랑법, 할아버지의 사랑법, 아버지의 사랑법…, 때론 어려워 보여도, 가풍을 외손자가 보고 배운 것처럼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 비록 지금은 부모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도 그 사랑하는 방식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박종용 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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