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1910년 동생 이회영(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시영(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6형제 일가족과 함께 독립군 기지 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해 서간도로 망명했다.
선생의 재정지원으로 1911년 서간도에 한인자치 기관인 경학사가 설립됐으며,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구국인재를 양성,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생이 기부한 자금으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가 설립돼 독립군 사관 양성을 위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렇게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쳤다.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과 몰락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생과 6형제들의 삶과 자취는 독립운동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역사에 남긴 표상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