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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와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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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1.11.08 17:29
  • 기자명 By. 뉴스관리자 기자

 

칼럼

낙엽을 밟다 보면 악기 소리가 들렸다. 멀리 수북하게 쌓인 은행잎이 보였고 무심코 달려가 낙엽더미를 밟다 보면 그런 소리가 났다. 생각하니 가야금이나 하아프 같은 현악기를 일시에 뜯는 것 같은 소리다. 노랗게 물든 채 가을바람에 일렁일 때는 섬세한 피리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얼마 남지 않은 잎을 우수수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또 바이올린을 그어대는 소리가 나겠지. 모든 악기가 자연의 소리를 재현할 수 있다고 보면 지금 저 마지막 떨어지는 낙엽도 조락의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 같다.

봄은 관악기 같은 이미지다. 호드기니 버들피리니 하면서 줄기를 꺾어 불듯 겨울잠을 깬 봄도 아기자기한 소리로 멜로디를 엮는다. 알을 까고 새끼를 치는 산새들의 예쁘장한 소리도 음색이 고운 관악기를 닮았다. 밀밭에 둥지 튼 노고지리가 몸을 빼기나 하듯 오르내리는 것도 몸체를 이어붙이며 조절하는 관악기 모습이다. 금속으로 만든 관악기를 연주할 때는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어야 소리가 맑아지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그 체질을 똑 빼닮았는지 새들 역시 겨울보다는 봄에 더 귀엽고 경쾌한 소리로 우짖는다.

며칠 후 봄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새로운 음역이 형성된다. 땅에 떨어질 때와는 달리 연못에서는 피아노 소리와 흡사했다. 밤에는 검은 건반에서 나는 소리라고 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온 하루도 아닌 밤에만 들리는 반음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환상적인 구슬비는 합주를 하듯 예스러운 분위기다.

여름은 때리는 식이라야 음이 나온다. 천둥소리와 처마 끝의 풍경도 폭풍 속에서 음을 만든다. 습기 찬 바람은 금속성 음까지 변화시키면서 여운을 띄운다. 모서리가 깨진 채 돋아난 여름밤 하늘의 별도 맑게 울리는 타악기의 경향을 띠고 있다. 가을 또한 풀벌레가 뛰어다닐 때부터 본격적인 추세로 나간다. 천둥소리가 덩지 큰 타악기라면 날개를 부딪쳐 쫑알대는 여치나 쓰르라미는 소규모적이다. 앙바틈한 녀석들이 작은 몸을 비벼서 소리를 낼 때는 심벌즈나 탬버린을 치는 것 같다.

가을이 깊어 가면 건반악기의 취향이다. 그 소리는 여름내 늘어져 있던 하늘을 찢고 나왔다. 짙푸른 하늘의 새털구름은 바위에 부딪치면서 구슬을 터뜨리는 물보라다. 짱하니 소리가 날 것 같은 기세는 여름과는 달리 눌러서 소리를 내는 모습이다. 실로폰같이 톡톡 쳐 주는 게 있지만 대부분 혼자 튀어 오르며 소리를 낸다.

이후 날씨가 추워지면서 하늘이 별안간 군청색으로 바뀔 때가 있는데 그걸 기화로 뛰어내리는 도토리 역시도 깜냥에는 한몫 거드는 행색이다. 깻송이가 쏟아지고 벼이삭이 마를 때의 바스락 소리도 잘만 구성하면 특유의 악기소리로 손색이 없다. 바싹 마른 콩. 팥꼬투리도 닿기만 하면 소리가 날 듯 팽팽하다. 거둬들일 때까지 단에 묶인 채 혹은 꼬투리 속에서 즉시로 소리를 낼 것 같은 초긴장상태다.

초겨울과 함께 앙상해진 나무는 바람의 활줄로 그어지는 현악기로 바뀐다. 똑같은 바람도 휘파람 소리가 나는가 하면 눈이 내리기 전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꽃눈을 싸안는 속삭임 같은 소리로 바뀐다. 땅속의 씨앗들이 얼지 않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등 저마다의 소리로 계절의 화음에 동참한다. 그 때의 구름은 잿빛으로 흐려지기 일쑤지만 쇳소리가 나도록 맑은 날씨에 추워 떨었던 것을 보면 오히려 낫다. 흐리다는 것은 대기가 느슨해졌다는 뜻이므로 기온은 오히려 상승되고 소리도 따라서 푸근해진다.

무지하게 춥다 보면 한번쯤 따스해지는데 그 때 맺히는 고드름은 타악기와 닮았다. 모서리가 닳고 녹아내릴 때 바람이 불면 영락없는 실로폰 소리다. 소리는 닮는다 해도 모양까지 흡사하기는 드문 일이지 싶고 그것을 본 뒤에는 현악기와 타악기로 합주를 한다고 생각했다. 봄비가 내려야 관악기와 타악기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만큼 겨울의 합주는 뜻밖이다.

계절에 따른 악기 배열도 관현악단과 비슷했다. 관악기에 해당되는 봄은 뒤쪽으로 가고 타악기인 여름과 가을은 한가운데 정렬해 있다. 온대지방의 특징이라 해도 겨울이 한 해의 양쪽 끝에 진을 친 상태라면 겨울에 해당될 타악기와 현악기가 양쪽으로 벌려 있는 건 맞아 떨어진다. 봄 시절의 관악기에 건반악기가 들어가고 현악기인 겨울나무 속에 고드름이 끼여드는 기본적 배치도다.

악기라 해도 관현악을 구성할 정도의 음색을 연출하는 건 또 얼마나 경이로운가. 저마다 떨어진 채 연주해서 그렇지 한 자리에 모아 펼친다면 세상에도 진기한 관현악단이 되겠다. 계절별 파트가 아닌 제풀에 짝짝 갈라지고 드러나는 서슬을 담을 수 있다면 굉장한 음역이 형성될 것 같다. 지휘를 맡은 바람이 한눈만 팔지 않으면 말이다.

/이정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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