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연할 때 법정 스님의 이 책은 큰 길잡이가 되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서점의 홍보에 무턱대고 사서는 반쯤 읽다가 책장으로 넣어버린 책들이 절반이던 시절이었다. 한 권, 한 권 스님께서 추천한 책을 읽어낼 때마다 오랜 세월을 거슬러 여전히 누군가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정신을 키워내는 그런 책을 선택하고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이즈음이었던 것 같다. 더불어 그런 책을 엮을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늘 마음속에 달고만 있던 소망이 드디어 지난해에 이루어졌다.
작년 가을, 내 생애 첫 출판을 했다. 청량한 바람이 온 대지에 가득하던 시월이었다. 등단하고 꼭 다섯 해 만의 일이었다. 글 쓰는 행복을 처음 알게 된 그 날부터 밤을 낮처럼 고심하며 썼던 습작들, 한 달에 한 번 지역신문에 기고하던 원고들을 모았더니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모였다. 책 제목을 짓는 일부터 주제별로 작품을 모으고 가르는 일까지 모든 과정에 정성을 듬뿍 들였다. 그리고 따뜻한 봄이 가고 뜨거운 여름을 지나 드디어 가을에 어미가 자식을 낳듯 책이 완성되었다. 책 읽기 좋은 계절에 맞춰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책이 탄생하다니 마음속 깊이 시월의 청량한 바람이 머물렀다.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책을 냈다며 소식을 전하고 선물할 때는 어깨도 으쓱했다.
그러나 자식 같던 내 책의 화양연화는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딱 서너 달이었다. 생각나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고 남은 책들이 세상의 빛은커녕 서재 구석에서 포장도 뜯기지 못한 채 표면 가득 먼지를 먹기 시작했다. 첫 대면의 설렘은 어디로 갔는지, 가슴 뜨겁던 순간들은 또 언제 이리 빨리도 식어버렸는지…. 한창 들떠 풍선처럼 하늘을 날던 날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애물단지로 전락한 채 짐이 되어버린 나의 첫 책. 무언가 대안이 필요했다.
며칠 몇 날을 고심하다가 전국 도서관을 떠올렸다. 각 지역에 있는 교육도서관과 시, 군립 도서관을 찾아보니 생각 외로 마을마다 포진해있는 작은 도서관까지 많았다. 옳다구나. 인터넷을 검색해 전국 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도서기증’ 제도를 활용했다. 명절 기간 내내 온종일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전국의 도서관을 검색하고 책을 보낼만한 곳을 찾아냈다. 혹여 반송이라도 될까 싶어 우편번호와 주소도 정확하게 적었다. 책 한 권, 한 권을 노란 봉투에 담아 나의 마음이 독자들에게 가 닿아 주기를 바라며 “도서기증”이라는 첨부서류를 넣어 풀칠로 봉했다.
드디어 어제부터 퇴근 후 우체국에 들러 책을 보내고 있다. 무게를 다는 저울 위에 책 한 권을 올려놓고 직원의 다음 안내를 기다린다. 그저 어두운 구석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좋은 듯 어느 지역 어느 도서관에 안착하게 될 책 꾸러미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가지런히 순서대로 우체국 우편물 함으로 넘어가고 있는 이 책들이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나마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값있는 삶으로 눈 뜨기를…. 감히 욕심을 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