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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천의 얼굴을 가진 예술가

한보라 배재대 아트앤웹툰학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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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3.12 13:58
  • 기자명 By. 충청신문
▲ 한보라 배재대 아트앤웹툰학부 외래교수
지난 편에서 창작자의 정서가 곧 트렌드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대 시각 예술에서 창작자의 정서는 얼마나 반영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예술을 자기 세계의 시각화, 욕망의 표출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어떤 작품을 대할 때, 마치 그 창작자의 혼이라도 담아 놓은 듯, 작품과 창작자를 혼연일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필자 역시 그로 인한 오해로 난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한 노출에 성적 표현이 담긴 필자의 작품을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람들은 말한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안 봐도 그렇게 생겼을 거야.’ 점쟁이가 따로없다. 필자를 보지도 않고 작품만 보고 필자를 예측해 단정 지었다.

그렇다면 이런 오해는 왜 발생했을까? 참고로 필자는 평생 모태솔로로 연애는 고사하고 그 흔한 소개팅 한번 못 해봤다. 그래서 더 당당하고 떳떳하기에, 과한 표현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만약 필자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방탕하고 문란한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숨기려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필자를 보지도 않고 방탕하다 문란하다 단정지었다.

그 무엇보다도 소통의 물꼬가 되어주어야 할 작품이 필자와 대중 사이에 만들어낸 웃지 못할 괴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은 대중과의 소통을 전제로 소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유무형의 매개체이다. 그것을 우리는 공감이라 하고 예술이라 한다. 그리고 대중은 거짓말을 안 한다. 보고 느낀 대로 자신의 정서에 대입해 공감하고 표출할 뿐이다. 그런 예술작품이 목적을 상실하고 대중과 소통을 못 한다면, 그것을 만들어낸 예술가의 역량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작금의 논점인 대중과의 정서적 괴리를 낳고 있는 필자의 예술가적 자질을 의심케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필자의 작품 속에 담긴 정서는 누구의 정서일까? 필자가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해서 발생한 해프닝일까? 아니면 필자가 어떤 요행을 바라고 거짓으로 꾸며낸 의도적 현상일까? 그것이 무엇이 됐든, 사람의 속내는 알 수 없기에 당사자인 창작자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필자는 좁은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할 뿐이다.

필자는 확신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대중을 속여 본 적이 없다. 대중과의 괴리에 현실적 필자의 삶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중이 지금 필자의 작품을 보며 느끼고 상상하는 모든 것들은 필자이며, 필자의 정서이다. 그런데도 괴리가 발생한 것은 같은 정서를 두고 발생하는 인간만이 표출할 수 있는 극단적 표현이 차이라고 본다. 필자는 절대 문란하지도 방탕하지도 않다. 그 정서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작품 세계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과감하고 노골적으로 필자의 삶과는 무관하게 생전 경험해 보지도 못한 것들을 표현하고 표출한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앞서 말했듯 같은 정서의 극단적 표현의 차이가 작용했다고 본다. 바로 억압이다. 억압은 예술성의 모티브로 시대를 떠나 창작자에게는 에너지원이다. 필자 역시 그 억압이 필자의 현실적 삶과는 무관하게 과감한 노출, 성적 연출을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필자 역시 사람이다. 현실적 삶이 뒤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사고적 욕망까지 옭아맬 수는 없다. 그 현실적 억압이 필자의 현실적 삶과는 전혀 무관한 작품 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필자가 생산해 낸 작품만을 보고 필자를 단정 지었던 것이다.

결국 필자의 작품은 필자의 현실적 삶과는 무관했지만, 필자의 정서가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얻어진 답은 제 아무리 자신이 아닌 듯 작품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창작자의 정서는 그 표현의 차이일 뿐, 어떻게든 작품 속에 묻어들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표현의 차이는 창작자의 현실적 삶과는 다른 정서적 해석이 나올 수 있기에 작품만 보고 창작자의 현실적 삶까지 단정 지을 수 없다. 그 예로 중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옌원화는 그림을 상징적 의미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그만큼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사고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그림을 분석해 미술심리학 및 그림 심리분석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을 활용해 그린 이의 심리상태를 확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치유적 목적인 병 의학적인 해석으로 필자가 논하고 있는 예술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있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 현상만을 논하지는 않는다. 작품을 극대화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다 더 명확하게 전달하고, 미학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스토리와는 무관한 다양한 상징물과 구도의 요소들을 인위적 기법으로 활용한다. 그런 예술적 작품을 놓고 물리적 증거를 유추해 퍼즐 조각을 맞추듯 프로파일링 접근법으로는 작가의 사고까지 읽는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사고가 정서이든 무엇이든, 예술 분야는 억압된 욕망의 표출에서 나오는 만큼 그 표현의 차이가 있든 없든 창작자의 많은 부분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여타 예술 목적 외의 다른 목적성을 가지고 활용된 물리적 파생물과는 그 성질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 분석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보는 이의 입장에서 추론해볼 뿐이다. 그 추론이 맞든 안 맞든 중요한 것은 정서 대 정서의 공감이 이루어졌느냐 못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엔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정서는 개인과 시대, 세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 시대, 그 세대, 그 환경이 말하고 싶은 걸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지금까지는 필자의 사적 견해다. 모든 건 필자가 아닌 대중들의 몫이다. 그러니 예술작품을 대하는 여러분들의 생각이 어떠하든 눈치 보지 말고 보고 느낀 대로 여과 없이 표출하기를 바란다. 예술은 살아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니 그 누구도 눈치 볼 것 없이 예술과 대화하며, 재미있는 문화생활을 영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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