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에게 있어 겨울이 유난히 길었고 견디기 힘든 불효에 움츠린 모습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인생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하였던가!꿈과 환상과 거품과 그림자이니, 아마도 우리네 인생의 헛되고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부모님에 대한 때 늦은 반성과 아쉬움은 이 시대 모든 자식들에게 존재하는 바윗덩어리이니 그저 흐르는 시간의 뜻으로 헤아려 인내하고 받아들인다면 머지않아 기쁜 마음으로 불효한 시간을 쓸어버리는 보배 같은 시간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TV를 켰는데 남쪽 마을 곳곳에서 벌써 ‘홍매화’가 넘실댄다. 옛날 우리네 선비들은 사군자 중에서도 특히 매화를 즐겨 그렸다고 하였는데 ‘동천년 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이요, 매일생 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에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며 의지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 것 같다.
봄에 피는 꽃 중에서 매화는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으로 개화되는 상황과 보는 느낌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먼저 매화가 피었는데 그 꽃 위로 눈이 내리면 설중매(雪中梅), 달 밝은 밤에 보면 월매(月梅), 옥같이 곱다 해서 옥매(玉梅), 향기를 강조하면 매향(梅香), 이른 봄에 처음 피어나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것은 심매(尋梅), 또는 탐매(探梅)라고 하였다. 우리네 삶도 매화처럼 고결한 삶을 추구하며, 욕심에 연연해 하지 않고 본연의 의지와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후회도 영혼의 상처 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작은 욕심을 부린다면 우리에게 존재하는 작은 바람에 항상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날들이 그득 하였으면 좋겠다.
햇살은 좋지만 찬 바람에 움츠러든 나의 어깨를 봄비가 다행히 바삐 움직이게 해 준다. 겨우내 물 한 방울이 그립고 바람이 아쉬웠던 우리집 다육이들이 햇빛이 부족하였던 거실에서 태양 빛으로 눈 부신 베란다로 나들이 간다.
나에게 슬픔을 주는 사람은 나에게 기쁨의 맛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도 언젠가 나에게 슬픔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서 살아간다면 그리 화낼 일도 없는 우리네 삶이 될 수도 있고, 또는 한 번쯤은 알고도 속아 주는 척하는 것도 멋진 인생이 될 수도 있겠다. 사실 바람 속의 티끌 같은 인생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의 늪이 얼마나 인간을 깊은 수렁 속의 불치병에 이르게 하는지 우리는 감히 짐작도 못 하고 살아가고 있다.
마른 나뭇잎이 그늘을 만들고 작고 푸른 새싹들이 땅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도록 기다려 주는 이 계절은 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에게 다양한 의미를 제공하고 배려해준다. 그리고 순환한다. 계절을 이기는 장사가 없듯이, 늦여름의 험상궂은 태풍도 한겨울의 매서운 한파도 계절의 흐름을 결코 바꿔놓지는 못한다.
계절에 순응하여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이, 봄이 오리라는 확신을 하고 개화를 준비하는 봄꽃들은 숭고하다. 그리고 봄에 피는 꽃들의 공통점은 혹독한 시련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언제나처럼 길 위 나그네의 삶을 지향하며, 잠시 찾아온 혹한과 폭설을 담대하게 견뎌내며 소풍 같은 인생길 위에 초연히 침묵하면서 군림하는 것이다.
행여나 시간이 허락한다면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당당하게 응시하며 생채기 내지 않고 긍정의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진한 커피 한잔에다 달달한 초콜릿을 듬뿍 녹여 마법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내 삶에 그려낼 것이다.